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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서인도와 대적자


남원환 작가- 대구출생 .대구성광고 졸업 .경북대 독문과 졸업  <주요저서>마음 중 단편 .대불(시집) .김대중 .한국전쟁 언저리 .금호강의 영혼(시집)






#매주 토요일 연재  









지하국가2       

14.대서인도와 대적자  



대서인도는 지구의 지하국가2에 발을 디딘다. 새로 건설된 지하국가2이다. 지구의 대서양과 인도양의 이름을 합하여 지어진 그의 이름이다. 한 층을 5미터로 생각하여 지상에서 고작 10미터 내려온 나라이지만 엄연히 지구와 맞먹는 나라이다. 그는 중력이 거꾸로 작용하여 하늘을 만든 인공궁창에서 배를 타고 5미터의 천장에 매달린 채로 배를 타고 있다. 피가 거꾸로 오랫동안 흐르면 배가 한 번씩 뒤집혀 정상으로 운행을 하기도 하다가 또 뒤집혀 운행된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 바로 밑에 설계된 하늘철도를 배처럼 거꾸로 타는 것이 아닌 바로 타고 간다. 신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어떨 때는 아예 무중력을 이용하는 우주복이나 신발 여러 가지 장비를 사용하여 5미터의 공간을 자유자재로 훨훨 날아다니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편하게 살고 있다. 오늘은 우주복에 충격을 흡수하는 에어백을 구비하여 공기기둥에 부딪히며 돌아다녀 본다. 자꾸 방향이 틀리는 것은 공기기둥과 박치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둥둥 재미가 있다. 눈에 안 보이는 공기기둥이 무척 많은 모양이다. 에어백을 장착하지 않은 때는 곡선으로 인공지능장치가 요리조리 피해가니 알 수가 없었는데 곡선비행을 하지 않은 방식을 택하니 보이지 않는 공기기둥의 존재가 드러난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날이다. 어제는 오늘과 다른 날이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다. 내일은 어제와 오늘과 다른 날이다. 불과 삼일이다. 72시간이다. 천 년을 살아가는 대서인도에게 삼일은 아주 짧은 날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72시간을 잠을 자지 않거나 계속 달리거나 몸을 움직이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생물학적인 한계의 벽이 있다. 밤이 되면 인간은 거의 반죽음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런 상태이다.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인 것이 분명하다. 엄청난 약점을 가진 인간이다. 사흘 밤낮이 흐르지 않은 지하국가2에서 대서인도는 오늘이라는 인간이 만든 시간 앞에 자신을 마주하고 있다. 세상에는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지만 기억할 수 있는 한계가 또 가로막으니 언젠가는 잘 모르게 된다. 오늘이 왜 의미가 있는가는 지하국가2에 대서인도가 왔다는 것이다. 잠에서 깨면 움직이고 돌아다니는 인간에게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인지 새로운 영역에 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 복합적 의미일 것이다. 원숭이도 사람보다 더 용감하게 아니면 무모하게 바다를 건너 먼 땅으로 가기도 한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나무뗏목을 타고 정처 없이 흘러간 것이긴 해도 인간보다 더 험한 항해를 하기도 한다. 지하국가2로 대서인도가 항해해온 것이다. 오늘 그런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인간이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인터넷을 서핑하기 시작하더니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대서인도는 모르는 사이에 오늘 지하국가2에서 중력이 마음대로 조절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불가능하던 공간이 자유자재로 활용되는 세상이 되었건만 느낌이 별로 새롭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이것이 새롭지 않다는 것이다. 내일이 되면 옛것이 되어 유물 취급을 받는다면 큰 혼돈이 머리를 칠 것이다. 오늘 대서인도는 무엇인가가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고향은 정말 낯설지가 않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고향을 찾는다면 낯선 얼굴로 다가올 것이다. 분명히 낯선 땅이건만 낯설지 않음이 문제의 초점이다. 이것은 분명 오늘에 만들어진 이상한 것이 아니냐이다. 아니 오늘 만이 아니라 오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이상한 적응이 아니냐는 것이다. 오늘 대서인도가 낯설지 않기 위해서 수십 년을, 수백 년을, 아니 수천 년을 의도적으로 움직였다는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느냐이다. 그렇다. 인간이 그리던 수많은 꿈속의 그림은 수백 만 년을 꿈에 그리던 일이 맞다. 오늘이 있기까지는 수백 만 년이 있었던 것이다. 지구는 46억 년이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고작 2백만 년을 있어 왔다. 바퀴벌레의 4억 년에는 정말이지 놀라운 감정이 싹튼다. 인간의 적응력은 백만 년 단위인데 바퀴벌레는 억만 년 단위이다. 오늘 대서인도는 시간개념이 그를 생각하게 만든다. 어제, 오늘, 내일은 과거, 현재, 미래의 축소판이다. 오늘 대서인도는 크게 다르지 않는 하루하루의 일상이다. 잠에서 깨고 밥을 먹고 밤이 되면 잠을 자는 반복적인 삶이 있다.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오늘 한 일은 백만 년 전이나 무엇이 다른가? 다를 것이 있나? 거의 생물적 활동은 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바뀐다는 것은 기나긴 시간을 요한다고 느껴진다. 그러니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사람은 움찔움찔 놀라고 현기증이 일 것이다. 대서인도의 나라들은 정말로 너무 발전 속도가 대단하여 만화의 이야기가 되었다. 오늘도 대서인도는 만화의 세상으로, 공상으로 오늘을 채우지만 그것이 결국은 꿈속에서 사람이 자꾸만 무의식이건, 의식적이건 그렇게 살고 있다는 오늘이다. 어제를 떠올려 보니 대서인도는 희미하게 떠오른다. 분명 24시간을 보냈는데 별 감흥이 없다. 평범한 하루였던 모양이다.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오늘이 쌓이고 내일이 쌓이고 무한정한 시간이 쌓여간다. 대서인도는 천 년을 쌓아가지만 알 수 없는 46억 년이 쌓여있고 또 쌓인단다. 46억 년에 그의 흔적을 새긴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흔적을 아무리 남겨도 그 흔적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그의 몫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누구의 일인데 그 연결점이 전혀 잡히지 않는다. 오늘 깊이 있게 대서인도가 하루를 보내지만 그것은 그가 느끼는 것이고 판단은 누가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지하국가2에 오니 나라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면 사전에 나라를 건설했다는 것이 아니냐? 그러네.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이지만 어제에 되어 있던 것이다. 어제에 되어 있는 것을 살피면 오늘이나 내일이 약간 보인다. 어제를 살피면 오늘을 예감한다는 것이네. 대서인도는 어제 무엇을 했는가? 일상적인 일을 했을 것이다. 인간이 어제 지하로, 우주로 발을 뻗치더니 자꾸만 지하와 우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오늘을 찾다가 되레 어제를 들먹여야 할 처지다. 어제 씨를 뿌리지 않으면 오늘이나 내일 싹이 돋지 못할 것이다. 어제 산삼을 심지 않았는데 오늘 산삼이 생겼다면 정말 희한한 세상이다. 어제 쌀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오늘 밥이 되어있다니 정말 좋겠다. 아기처럼 어제, 오늘, 내일을 아예 모르면 좋겠다. 걱정도 근심도 없고 아무런 조치가 필요 없다. 아기도 금방 자신의 모습이 바뀐다. 누워만 있다가 기기 시작하고 걷기 시작한다. 어른이 되어서는 분명히 알겠는데 자신을 자신이 알 수 없는 아기이고 아기 때의 기록된 영상물을 보지 않고선 알 수가 없다. 대서인도의 오늘도 시간이 지나면 아기의 걸음마나, 기는 동작처럼 도저히 기억해내지 못하는 일이 될 것이다. 대서인도의 오늘은 영원히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알 필요성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 대서인도는 심하게 흔적을 조각하는데 그런 것이 필요한 날인 모양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닮은 2세를 세상에 남기려는 동물의 본능처럼 흔적을 새기고 있다. 오늘 새긴 흔적은 내일이면 의미가 더해진다.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할머니는 누가 보아도 할머니이다. 얼굴에 세월이 각인된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이다. 대서인도의 삶이 새겨진 대서인도는 그의 얼굴이다. 오늘은 지하국가2에 발을 디딘 날이다. 어린 아이가 첫발을 디딘 이후로 평생 동안 몇 발자국을 디딜 지 어마어마한 발자국을 디딘다. 그 어마어마한 천 년을 사는 사람의 발자국도 처음에는 어린 아이의 첫 발자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 첫 발자국이 새겨진 것이다. 신생아의 발바닥을 종이에 찍어 만들어진 발도장 모양을 어른이 되어 보면 너무나 작은 발에 놀랄 것이다. 손도장을 찍어 만들지 않고 신생아는 발로 종이에 예쁜 발로 도장을 찍는다. 공룡의 발자국은 한반도가 6천 5백만 전에 공룡이 살았음을 증명한다. 아기의 발을 도장으로 찍으면 언제 6천 5백만 년이 되나? 공룡의 발자국은 억 년 단위를 기억하게 만든다. 어제가 억 년이라니. 발자국이 억 년이다. 대서인도의 발자국이 억 년을 간다고 하니 이제야 공룡이 된다는 것인가? 대단한 공룡인데 죽고 없다. 20억 년 전의 지각을 관광하고 억 년의 공룡 발자국을 보고 어제를 생각하고 오늘 대서인도는 그 긴 시간이 그의 앞에서 계속될 것이란 당연한 지구를 알고 있다. 억 년씩이나 지나니 바다가 땅이 되고, 땅이 바다가 되고 천지가 개벽을 한다. 오늘 천지가 개벽한다면 지구와 달이 한 덩어리가 된다는 것이냐! 대서인도는 조금 움직였다. 움직인 것이 분명하다. 신생아가 팔을 휘돌리지도 못하는데 고개를 약간 돌렸다 해도 어머니는 잘 알게 된다. 어머니는 조금 움직인 신생아의 움직임을 대단히 잘 관찰하고 귀여워한다. 대서인도가 조금 움직인 것은 귀여운 것이고 어머니가 볼 때는 기쁜 일이다. 아기가 움직이는 것이다. 자꾸만 움직인다. 아기가 움직이지 않으면 부모에게는 커다란 비극이다. 오늘 대서인도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아!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정답이다. 움직인다. 지구도 움직인다. 그 지구에 속한 모든 것이 움직인다. 지구자체가 움직이는데 어찌 안 움직일 수 있나? 오늘은 움직인다. 내일도 움직인다. 어제도 움직였다. 하루 네 시간 움직이면 이십 시간이나 누워 있는 몸에서 빠진 칼슘을 채워준다고 한다.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몸에서 뼈의 성분이 모두 빠져 나가 인간은 살지 못할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뼈는 없어진다. 오늘도 내일도 대서인도는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으면 근육도 쪼그라질 것이다. 어제, 오늘, 내일도 움직이는 사람이다. 오늘 조금 움직인 대서인도는 내일도 능력껏 움직여야 한다. 어제의 움직임의 합이 오늘의 건강이고 내일의 건강이다. 오늘의 움직임이 내일의 건강이고 대서인도의 앞날이다. 아기는 움직인다. 운동선수는 움직인다. 사람은 누구나 움직인다. 오늘 대서인도는 움직였다. 답답한 것은 사람이 움직일 수 없을 때이다. 아프거나 노년이 되어 힘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이가 튼튼하지 못하면 먹는 것이 부실해진다. 몸이 약해지면 영양을 적게 섭취하고 자꾸만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된다. 어느 날 움직임이 옛날과 다르다고 느낄 때 자신감이 당연히 줄어든다. 성장하는 소년, 소녀나 청년, 처녀는 몸이 자꾸만 좋아짐을 느낄 테지만 어느 순간 반대의 경험이 인간을 정신이 번쩍 들게끔 만든다. 200미터를 헤엄치던 젊은 날이 있었는데 헤엄을 칠 수 없고 20개의 턱걸이가 한 개도 되지 않는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한다. 움직임이 줄어들고 또 줄어들고 그러면 결국에는 주저앉고 죽게 된다는 결론이 아니냐이다. 대서인도는 움직여야 한다. 오늘 움직여야 내일이 있게 된다. 오늘 움직이지 않으면 내일은 죽게 된다. 오늘을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 과도하게 오늘을 채우려다가 뒤로 나자빠지는 잘못을 해서도 안 된다. 그러면 너무 꼼꼼하게 하루를 사는 인간이 아닌가? 인데 꼼꼼해진 대서인도가 되는 것이 안쓰럽기도 하다. 오늘 꼼꼼하게 정해진 예정표대로 움직이는 인간이다. 정말 어린 아기 때부터 늙은이가 되도록 늘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인간이다. 그 시간표를 확 바꿔버릴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 시간은 주어져 있다. 시간을 관리하는 것은 인간이다. 대서인도가 그 자신의 시간을 관리하지만 절대적인 생명의 시간은 그의 힘으론 관리가 되지 않으나 한계 지워진 시간에서 그가 잘 다듬을 수 있는 한도는 노력이 좌우하는 부분이다. 오늘 할 수 있는 노력의 부분을 성실하게 쌓아보자는 현실론이 그의 하루이다. 계속하여 잘 가꾼다면 큰 성과도 기대할 수 있다. 건강을 관리하면 건강해지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공부를 잘하게 되고, 사람이 노력하는 데 따라 결과물이 나오는 정해진 이치가 있음이다. 오늘은 오늘의 기운을 최대한으로 잘 활용하고 보존하여 내일을 위한 에너지로 충전하고 보태야 함이다. 대서인도에게 대체적으로 주어진 천 년의 생명을 보람 있고 알차게 하는 오늘이 내일도 틀림없이 적용되어 잘 짜인 생명의 시간표가 궤도를 이탈하지 않아야 대서인도가 된다. 오늘 지하국가2는 잘 구비되고 미래를 밝게 보장해주는 희망이다. 어제를 꿰뚫어 보면 허물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허물을 고치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 허물을 고치지 못하는 어리석은 길이 아니라 하나의 허물을 고치고 또 하나의 허물을 고치고 내일에는 허물을 만들지 않은 오늘, 내일을 자꾸 쌓다보면 사람의 천 년을 괴로움이 덜 할 것이다. 어제 미룬 게으름이 오늘에 부담이 되고 내일에 짐이 된다면 그 크기는 자꾸 커지는데 그 짐을 벗기 위해선 오늘 자신의 힘이 닿는 한도 내에서는 고치고 다듬는 것이 도리이다.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잘못이나 모순도 개선하려는 사람의 뜻이 있으면 바꿀 수 있다. 오늘 바꾸는 것이다. 바꿀 수 있음이 용기이고 인간됨이다. 용기는 마음에 있다. 잘못을 바꿀 용기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실천하지 않는 게으름이 문제이다. 마음의 게으름을 쓸어내 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실천적 용기는 인간이 더 올바르게 나아가고 향상되게끔 유도한다. 거울을 닦으면 밝게 빛나듯이 용기와 인격도 닦으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하루에 하루를 더하고 용기를 천 년이나 키우고 인격의 그릇을 천 년이나 키우면 나쁠 것이 하나 없다. 오늘부터 인격의 그릇을 깨끗이 닦아본다. 닦으면 닦이는 것이 사람이다. 우주 만물이 제 모습이 있듯이 사람도 제 모습을 잘 가꾸어 닦아 바꾸어 멋진 사람으로 되살아나고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부처가 달리 부처인가? 모든 사람이 불성을 가진 부처라니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고, 닦으면 빛나는 예수 같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된다. 오늘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리되는 일이 생긴다. 하루는 긴 시간일 수도 짧은 시간일수도 있지만 멋진 인생에 보탬이 된다면 행복한 긴 시간일 것이다. 행복한 긴 시간을 점점 보태어 가다보면 행복한 사람이다. 멋지고 의미 있는 나날을 보태어 그것이 일생이라면 성공이다.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마음이 조절되고 평화롭게 되는 수련이 쌓이면 그 공든 탑이 아름다운 미소를 보내준다. 대서인도가 이룬 정성과 노력의 탑이 현실로 나타나면 더 나은 곳이 됨은 당연하다. 내일이 오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어제의 내가 아니듯이 내일은 오늘의 내가 아닌 다른 멋진 나의 모습이 됨이다. 오늘 대서인도가 큰일을 했음이다. 작은 움직임이라지만 나라가 세워진 날이다. 지하국가2 말이다. 지하에 자꾸만 나라가, 사실은 지구가 만들어진다. 지구를 만든다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만들어지니 놀라움이 적지만 용기가 세어서인지 얼토당토않은 만용인지 지구를 만들고 있다. 생존에 대한 거대한 물줄기가 너무 세게 치솟아 오르니 되는 것이다. 끝까지 이루고자 합심으로 이끌어가니 이끌어가는 대로 성공의 행복이 달성된다. 오늘 간절히 바라면서 간구하는 인간에게 그 답을 주는 것이다. 답이 너무 어려워도 참고 견디며 찾는다면 찾아질 그 날이 있고 이루는 날이 있음이다. 대서인도는 더 먼 후세까지도 인간에게 빛을 발하여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라면 그 기쁨에 더 사람을 위하여 일할 것이 분명하다. 마음이 평온과 즐거움이 있는데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할 것이기에 그렇다. 대서인도는 지하국가2에서 본분을 다할 것이 점쳐지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긍정하는 일이다. 긍정하는 공감의 분위기이다. 긍정은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어려운 역경에서도 성공한 사람들을 살펴보니 긍정하면서 악조건을 개선시켜 상황을 더 좋게 만들어 성공했다는 것이다. 절망하지 않고 마음을 바르게 잡고 길을 찾아 나온 사람들이 많다. 마음이, 정신이 중심을 잃지 않으면 차차로 반전이 일어나 현실이 극복되는 것이다. 지하로 내려와서도 큰 어려움 없이 잘 영위되는 지하국가2이다. 어제의 어려움과 아픔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발걸음이 아기의 작고 어여쁜 발걸음에서 씩씩하고 당당하며 힘찬 청춘남녀의 발걸음으로 나아가니 성공과 행복의 길잡이가 된다. 대서인도가 제시해온 행복의 시간표가 갈 길을 잘 가고 있다. 긍정하는 사람은 얼굴이 밝다. 어마어마하게 긍정하는 사람은 그 즐거움을 감출 수가 없다. 열 명의 형과 한 명의 동생이 모두 자기를 위하여 절을 한다고 하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보다도 더 좋은 일이 꿈속에서 일어나니 그 꿈을 모든 형제와 부모에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두들 믿지 않지만 그 꿈을 꾼 당사자는 믿기도 하고 그 꿈속의 약속을 하나님이 하니 더 믿고 말을 하는 누구를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가섭이 부처님과 통하여 염화미소를 머금기도 한다. 너무 긍정이 심하여 기쁨으로 살기도 한다. 아기는 어머니 품안에서 무한한 긍정을 느끼며 행복하게 산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품안에서 아기처럼 행복하다고 한다. 부처님의 자비로 인해 무한정 행복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긍정은 세상을 환하게 만든다. 긍정은 성공의 보증수표가 되기도 한다. 소나 돼지를 키우는 농부일지라도 자신의 가축을 정성을 들이면 들인 만큼 토실토실하게 잘 자랄 것이고 그 반대이면 그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람은 기쁨이 넘치면 감추거나 숨길 수가 없다.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금슬이 좋은 신혼의 부부는 당연히 그 즐거움이 드러난다. 긍정하며 산다는 것은 행복해진다는 점에서 인간이 감정을 무시할 수 없다는 증거이다. 감정을 되도록 좋은 쪽으로 끌고 갈 필요성도 있다. 어린 아이와 여인은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 어른이 된 남자는 잘 웃지 않기 때문에 수명도 여자보다 짧다. 대서인도는 즐겁지만 모든 사람이 즐겁게 되도록 해주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데 잘 웃어야 하건만 잘 웃지 않으면 허사이다. 기쁨에 빠져서 천 년을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 행복을 추구하는 행복추구권이란 기본권도 있다. 지하국가2의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일이 있다. 즐거운 일이 있다. 각 개인이 행복하게 되어야 한다. 유교에서는 오복을 논한다.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오복으로 꼽고 있다. 대서인도는 천 년을 사니 수명의 복이 있고, 의식주가 자동으로 해결되니 부자로 복이 있고, 마음의 즐거움이 있으면 또 다른 복이다. 복은 지어서 복을 받는다고도 하니 복 받을 일을 평생하고 살아야 한다. 사람을 복되게 하면 그 상대방이 알아차리고 대접을 한다. 사람은 사람에게 이로운 것들을 더 이롭게 만들어 가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에게 복이 되는 것을 전수하고 발전시켰지 사람에게 해가 되고 나쁜 분야나 그런 것들을 없애거나 개선시키며 이제껏 온 역사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긍정이 무조건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옳지 않은 것까지 긍정할 수는 없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사람이다. 대서인도가 생각한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도 천 년을 사는 것을 옳다고 보아 왔다. 당연히 옳은 것이다. 그것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는 따질 이유가 없었다. 의식주가 자동으로 그저 해결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것도 당연히 옳다고 여겼다. 이것을 문제 삼으면 지하국가2가 애초에 틀리다는 원초적인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고 지구를 지배한다고 했다. 지구를 지배하다보니 도리어 망하게 되자 다른 방법을 찾아온 지난 세월이다. 만물의 영장으로 자꾸만 오래 살고 싶어 천 년을 살고 있는데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했고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것이란 긍정과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는 인간이다. 긍정이 무한대로 번진다면 무엇이 끝이 될 것인가? 그 끝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긍정일지라도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긍정은 올바른 것이지만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긍정은 불필요한 것이다. 분명히 긍정의 궁극적인 기준을 염두에 둔 것이 옳다.



대서인도는 아직도 하루를 마감하지 못하고 있다. 하루를 늘일 대로 늘이는 기분이다. 24시간, 24시간 곱하기 60은 1,440분이다. 초로 따지면 단위가 커진다. 운동의 기록경기들은 대부분이 초단위로 아니면 더 세분된 단위로 계산을 하는 경향이 많다. 매일 매일을 초를 다투며 사는 인생은 긴장과 압박이 심하다. 과거로 갈수록 사람은 시간에 대하여 자연적인 시계를 사용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든다. 생체시계가 작동하여 그 리듬에 맡기면 되었다. 산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이 광범위한 지역을 연결하여 활동범위를 넓힐수록 이곳과 저곳의 시간이 조금씩 차이나는 일이 발생했다. 기차나 비행기 같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대구에서의 해 뜨는 시각과 독일 베를린의 해가 뜨는 시간이 약간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일치를 시키지 않으면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서로의 시간을 조절하여 맞추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는 지구가 될 수 없었다. 시간을 수많은 사람이 동일하게 적용하려는 것이 실제화 되고 그렇게 살게 됐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세상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거나 고려하지 않고는 일이 성사되지 않게 되었다. 대서인도도 초단위로 모든 시간이 쪼개져서 합당하게끔 사용하라는 시간계획표에 붙잡혀 있는 인간이다. 하루가 처음부터 끝까지 천문학적인 인간의 합의에 근거하고 있다. 대단한 일치이다. 그 많은 인간이 어떻게 똑같은 시간을 맞추고 살고 있는데 잘 운용된다. 1,440분은 매우 정교하게 틀이 지워지고 계획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잘 돌고 있는 현실이다.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다. 예전의 인간들은 자연적인 시간을 지켰다고 여겨지나 현세의 인간은 인간이 인공으로 정한 시간을 잘 지키고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의 기준에 들어가 있다. 공부할 나이, 결혼할 나이, 은퇴할 나이, 무엇을 해야 할 나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면 대서인도는 오늘부터 무엇을 해야 할 나이인가? 기저귀를 차고 어린 아기처럼 기어 다닐 수도 없다. 나이에 합당한 일을 해야 한다. 나이 값을 해야 한다.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식으로 생각들을 한다. 나이는 시간과 관계가 있다. 시간이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고 올바르게 작동하라고 요구한다. 하루도 시간이고, 이틀도 시간이고, 사흘도 시간이다. 시간이 인간의 모습을 다르게 만들고 인간이 더욱 진화된 동물로 고등동물로 인식되게 만든다. 시간이 갈수록 더 똑똑해지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초단위보다 더 짧은 시간이 있지만 인간이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다. 너무 짧으면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너무 길어도 현실감이 떨어진다. 하루로서 천 년을 보고, 듣고, 여행하기는 대부분이 책이나 영상물이나 공상내지 상상의 능력을 통하여 감지한다. 뇌의 능력으로 시간을 가늠하는 것이다. 생체시계로 시간을 느꼈는데 그것은 하루의 시간이라면 그 외의 어제나 내일이나 과거나 미래는 뇌의 영역으로의 시간이다. 생물이므로 생체시계의 시간과 인간인 학습능력으로서의 시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영역을 무한대까지 만큼이나 넓혀준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달릴 때는 인간이 엄청난 존재로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생물로 돌아온 하루의 시간은 너무도 비슷한 나날이다. 대서인도는 오늘 하루이지만 뇌의 영역으로서의 시간을 가지고 억만 년을 돌아다닐 수 있다. 그러니 오늘이 하염없이 길게 될 수 있다. 어느 날 꼬마 아이가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기 시작하면 시간은 무한대로 늘어나기 시작하는 시초다. 할머니의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거짓말일까? 참말일까? 꼬마 아이는 혼돈스럽다. 할머니의 여동생도 할머니인데, 할아버지의 동생도 할아버지인데 인사를 시키면 머리가 꽤 복잡해진다.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에 복잡해지는 것이다. 하루가 모여서 50년, 100년이 되면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무리한 시간이 된다. 인간은 영원히 시간을 정복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시간이 정복되면 세상이 어떻게 되어간다는 것인가? 잘 알 수가 없다. 대서인도가 오늘 하루를 정복하고 내일도 정복하고 영원히 시간을 정복하면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천 년을 정복한 대서인도이지만 오늘의 의미도 매우 어려운 문제라 끝이 드러나지 않을 판이다. 슬로우 푸드는 시간을 요한다. 아기의 탄생도 열 달의 임신을 요한다. 아기가 성인이 되려면 20년을 요구한다. 20년이 지나 성인이 된 남녀를 보면 어제된 것 같지만 20년이 소요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오늘을 모으고 모아서 천 년이 되고, 일 년이 되곤 한다. 오늘의 메뉴가, 오늘 하는 일이 반복이 되어 큰 일이 된다. 대서인도는 오늘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천 년이나 반복하는 일이 무엇인가? 숨쉬기, 먹기, 잠자기 등은 변함없이 하는 일이다. 그것과 더불어 끊임없이 하는 일이 있다. 오늘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오늘 하는 일이 거의 어제와 비슷하다고 가정할 근거가 있음이다. 오늘을 쪼개고 쪼개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대서인도이다. 그의 일생은 그의 일생이지 다른 사람의 일생이 아니다. 오늘을 짜고 또 짜고 또 덮씌우고 하여 내일을 만들고 일생을 만든다. 오늘 대서인도는 일생을 짜깁기하는 것이다. 오늘이 일생이다. 그렇다. 오늘 하루가 평생이라니 말도 되지 않지만 일생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일생 중에 오늘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려도 누구 하나 문제 삼지 않는다. 오늘 대서인도가 생명이 다 되어도 우주 속에서 의미도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 오늘을 더 소중하게 간직하고픈 것이 아니냐? 소중하게 만들 누구도 없고 그 자신이 그렇게 부여하는 의미일 뿐이다. 이 우주가 아무도 관련 없는 듯이 혼자서 오늘을 만드는 것이냐? 그가 오늘 왜 이리 긴 하루일까? 알 수 없는 하루일뿐이다. 하루가 가면 또 하루가 온다. 대서인도가 다음날이 오지 않도록 막아낼 수 없다. 그냥 오는 것이다. 그냥 무작정 오는 세월이 하루가 아니라 그것이 십 년이 되고, 백 년이 된다. 오늘 같은데 십 년이 지났다고 한다. 어제 같은데 이십 년이 지났다고 한다. 이십삼 년 전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답답함은 똑 같지만 달라진 것은 정말 갑갑하던 이십삼 년 전의 오늘이었지만 이제는 그 답답한 오늘에 최면을 걸고 있다는 사실이다. 똑같이 돈은 벌리지 않고 똑같이 혼자 살면서 똑같은 심리상태인 것 같지만 똑같지 않다고 최면을 걸고 더 성공할 수 있다고 또 최면을 걸고 사실 능력이 향상된 부분을 한계상의 수명 속에서 성공을 위해 기회를 꽉 잡으려고 또 최면내지 직업으로, 운명으로 지내는 하루가 된다. 이십삼 년 전의 적응되지 않은 이상한 생활이라고 했던 것이 이십하고도 삼 년이 지나도 정상으로 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 정성들여 갈고 닦는 것이 사람이다. 대서인도의 이십삼 년 전에도 하루가 있었다. 그날도 오늘이었다. 아침에 일어나고, 아침을 먹고 하는 일을 했다. 점심을 먹고, 또 그렇게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미래의 행복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정말 미래는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미래일 것이라 보이던 것이 지금에 와서 보면 전혀 딴판의 그림이다. 상상하지 않은 오늘이 되어 있다. 또 이십하고도 삼 년이 지난 오늘 상상하지 않은 오늘이 되어 있을 것이란 추측이 되는 현실이다. 오늘 무엇을 하고 있나? 이십삼 년 전에도 오늘처럼 일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가? 이십 년이면 긴 시간이다. 오늘이 이십 년이나 되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대서인도의 오늘은 하루가 아니라 꽤 긴 시간의 오늘 같다. 오늘은 삼십 년이다. 이런 말이 된다. 어떤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면 그것은 삼십 년, 아니 백만 년이 지나서 오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냐? 대서인도가 오늘 본 사람은 대부분이 50년, 60년을 본 사람이 아닌가? 오늘 본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따지면 말이다. 50년 동안을 보아온 끝에 오늘에 보는 것이다. 60년 동안을 보아온 끝에 오늘에 보는 것이다. 그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오늘 보는 인간은 이백만 년을 보아온 끝에 오늘에 보는 사람인 것이다. 오늘이 이론상으로 꼬아보면 머리가 띵해진다. 오늘 비가 온다면 삼십 년 전 오늘에도 비가 올 확률이 높고 앞으로 삼십 년 후에도 비가 올 확률이 높다. 오늘 추우면 백 년 전 오늘에도 추웠을 공산이 크고 백 년 후의 오늘에도 추운 날이 될 것이 거의 맞지 않을까? 오늘의 그 사람은 전후 삼십 년 전의 그와 천양지차로 다르진 않을 것이다. 물론, 마음의 수양으로 정신적 능력이나 태도는 많이 변할 수 있을 것이나 대부분 별반 차이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다. 달력이나 책력은 이천 년이나 오천 년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이천 년 전의 달력, 오천 년 전의 책력, 현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이 비와 물로 이루어진 우수(雨水)이면 오천 년 전에도 똑같은 절기로 그와 비슷한 날씨이다. 오늘이 오천 년 전이며 오천 년 후이다. 그러고 보니 대서인도가 뭐 하나 바꾸거나 뜯어 고쳤다고 여길만한 것이 없는 것 같은 현실의 오늘이다. 오늘 시간은 가고 있다. 어제도 시간은 갔다. 내일도 시간은 간다. 대서인도는 오늘 씨앗을 뿌린다고 생각하고 있다. 씨앗이 생각으로 뿌려질까? 하지만 생각의 밭은 씨앗을 생각으로 뿌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밭도 생각의 밭이 있다. 생각의 밭을 많이 가지고 열심히 잘 가꾸면 생각의 부자가 되고 결국은 세속의 부자도 된다. 생각의 씨앗은 각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는 미래이다. 오늘 그는 단단히 생각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그 씨앗을 그가 수확해도 되고 그 어느 누구라도 가꾸어서 잘 키워 활용할 수 있다. 오늘의 씨앗은 내일에는 열매가 된다. 씨앗을 잘 가꾸어야 열매가 있을 것이 아니냐?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씨앗이란 의미가 오늘 큰 것이다. 씨앗은 어머니의 모습이고, 생산의 모습이고, 기다리는 자의 얼굴이다. 씨앗은 무척 기다려야 한다. 어둡고 컴컴한 땅 속에서 기다려야 한다. 적당한 온도와 물과 영양분이 오도록 기다려야 한다. 자신이 해 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 환희 시간에 잘 맞추어서 싹을 틔워야 한다. 싹을 틔울 의무가 있다. 대서인도가 오늘 지하국가2에 와서 무슨 생각의 씨앗을 뿌리냐? 추상적이다. 정확한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오늘 그렇다는 것이다. 오늘의 일거리이다. 너무 일거리를 많이 받으면 탈이 난다. 오늘 일거리만 해도 힘에 부치니 더 요구하면 악독한 사람이 일을 시키는 꼴이 된다. 오늘 일은 이것이다. 더 넓히면 힘들다. 이것이다. 그는 오늘 쉬어야 한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을 마감하려하나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남은 시간 동안 생각의 씨앗, 생각의 싹, 생각의 열매를 차례로 점검해 본다. 씨앗, 싹, 열매는 농부의 마음이 숨어 있다. 씨앗이 참 중요하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씨앗은 다음 해의 농사를 위해 준비되고, 보존되어 있어야 한다. 씨앗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식량이 생산되지 않으면 그러면 사람은 죽게 된다. 생존의 문제이다. 씨앗은 결국 인간의 생명줄이다. 씨앗을 좋지 않은 것을 준비하고, 씨앗을 가당찮게 여길 농부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이던지 간에 기초가 되는 생각의 씨앗을 잘 살피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인간이 죽을 수 있다는 추론을 만들면 정말이지 생각의 씨앗은 중요하다. 씨앗이 싹으로 돋아나야 농사를 지울 수 있다. 싹이 나지 않으면 절망을 느끼는 농민이 된다. 생각의 씨앗이 싹이 돋아나지 않으면 사람의 미래는 절망이 될 공산이 크다. 열매가 맺기까지는 상당한 노력과 정성과 조건들이 맞아야 한다. 생각의 열매도 쉽게 맺지는 못한다. 들판에 씨앗을 뿌리는 농부는 선조들이 했던 것처럼 기나긴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좋은 씨앗을 잘 지켜왔기 때문에 씨앗을 뿌릴 수 있다. 오늘 뿌리는 씨앗은 수백만 년을 인간이 잘 보존해온 인고의 산물이다. 오늘이 인간의 역사인 셈이다. 생각의 씨앗도 정말 잘 지켜야 한다. 그 씨앗이 결국은 인간을 살찌우는 길이 된다. 대서인도가 지하국가2에서 씨앗을 뿌리는 농부이며, 생각의 씨앗을 뿌리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씨앗을 뿌리고 잘 가꾸어야 하는 당연한 책무가 있다. 씨앗은 싹이고 열매이다. 열매는 씨앗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의 씨앗이 열매가 된다. 오늘은 씨앗이고 오늘의 열매는 과거의 씨앗으로부터 왔음이다. 갈수록 과거의 씨앗은 오늘의 씨앗보다 사람에게 덜 좋은 것이 될 것이고 오늘부터 내일의 씨앗은 갈수록 더 좋은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의 기준에서 더 좋은 씨앗을 선택하고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자연도 똑같이 반응할 것이다. 철저하게 사람이 이기적으로 씨앗을 선택한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씨앗은 인간으로부터 선택을 받는다. 지구에서 인간이 번성하는 것은 지구가 인간을 선택하고 있음이다. 지구가 혹은 우주가 인간을 선택하지 않으면 즉, 인간을 지구의 씨앗으로, 우주의 씨앗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인간의 미래는 암울해진다. 인간이 스스로 지구와 우주를 활용하고 지배한다고 하지만 씨앗의 관점에서 주인이랄 수 있는 지구와 우주가 인간을 적절한 씨앗이라고 하지 않으면 씨앗의 역할을 못하고 없어지게 될 무서운 운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씨앗만을 선택하여 키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알고 보니 사람은 지구와 우주에서 씨앗의 역할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지구와 우주에 정성이 깃든 착한 일을 해야 하는 점이 드러난다. 사람이 최고였으나 사람도 그 무엇에게 씨앗처럼 선택되는 일을 겪을 수 있다. 생각의 혼란이 온다. 사람이 멋대로 씨앗만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아닌 다른 것이 사람을 씨앗으로 고를 수도 있다는 역진리가 머리를 아프게 만든다. 오늘은 씨앗이 중심이 되는 날이다. 씨앗이 중심이지만 씨앗을 뿌릴 밭도 있어야 한다. 씨앗 혼자는 되지 않는다. 좋은 밭도 있어야 한다. 대서인도의 씨앗이 지하국가2라는 옥토를 만나 좋은 싹이 튼다는 내일을 바라는 것이 지금이다. 오늘은 당장 수확이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열매가 있을 것이다. 오늘의 열매는 그전에 일구었던 것에서 오는 것이다. 씨앗이 없는 세상이 가능할까? 씨앗을 뿌리지 않았는데 싹이 나고 열매가 열린다. 노력하지 않았는데 결과가 있다. 밥을 먹지 않았는데 배가 부르다. 결혼하지 않았는데 아기가 생긴다. 남녀관계를 가지지 않았는데 임신이 된다. 희한한 경우가 실제로 생기긴 하나 특수하고 예외적인 경우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씨앗이 있어야 일이 진행된다. 대서인도는 천 년을 생존하는 이상한 씨앗을 가지고 있다. 우주나 지하에서 생존하는 좋은 씨앗도 가지고 있다. 다음 단계는 싹이 트는 단계이다. 열매는 차차로 열릴 것이다. 사람이 이용하는 열매는 많다. 모든 식량, 과일, 의식주에 사용되는 만물이 있다. 만물은 모두 씨앗이 있다. 철칙이다. 씨앗은 고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씨앗은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 과학이 발달하니 멸종된 동식물의 유전자를 다시 살려 멸종을 새로운 탄생으로 뒤바꾸는 일도 한다. 씨앗은 수천 년을 단절하다가도 살아난다. 놀라운 복원력이다. 씨앗이 다음의 씨앗으로 전해주려는 메시지는 무얼까? 알 수 없는 자연이 씨앗으로 영원한 자연이 계속 되도록 하고 있다. 대서인도가 어찌 한다고 해서가 아니라 씨앗이 씨앗으로 전해지는 무엇이다. 씨앗과 싹과 열매가 있다. 사람이 아기에서 어른으로 노인으로 가는 인생행로처럼 길이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거의 아기가 생긴다. 씨앗과 밭이 있으면 열매인 아기가 생긴다. 너무나 당연하다. 아니 씨앗이 남자의 정액이고 밭이 여자의 자궁이란 말이 틀리지 않는 사실에 해당한다. 그럼 이제껏 남녀의 생식으로 아기를 만드는 일에 대해 빙빙 둘러 이야기 했단 말인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약간의 논리적인 연결고리가 생긴 때문이다. 식물과 동물의 차이지만 자연의 이치는 거의 다르지 않은 이유에서이다. 씨앗은 식물개념이고 정자나 정액은 동물개념이다. 구분을 하지 않고 생각의 씨앗을 펼치다보니 그런 것이다. 씨앗을 보존해 왔다면 당연히 동물도 정액이나 정자를 악착같이 보존해 왔다는 것이 된다. 씨앗 보존의 법칙이 정자 보존의 법칙과 일맥상통해진 꼴이다. 먹고 살기 위해 씨앗을 절대적으로 보존하듯이 남자의 정자를, 정액을 그렇게 보존해왔다는 것이 아니냐? 말이 이상하게 얽혀진다. 그 참 이상하네. 성씨를 부를 때 씨를 붙인다. 김씨, 이씨, 남씨, 등등 씨앗이란 말인가? 김 씨앗이다. 이 씨앗이다. 남 씨앗이다. 그런 말이란 말인가? 그런 모양이다. 씨앗의 개념이 들어있다. 씨앗이 중요하고 성 씨의 씨가 중요한 모양이다. 씨가 씨앗이 아니냐? 씨나 씨앗이나 엄격하게 구분하면 다르지만 그런 종류이며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씨를 받아서 싹을 돋게 하여 열매를 맺는다. 김 씨의 씨앗을 받아 아기를 낳아 김 씨를 만든다. 그런 것인가?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누구 씨라고 한다. 사람이 씨앗이네. 이런 사람이 씨앗이다. 〇〇〇씨, 〇〇〇씨 사람 이름 자체가 씨앗이다. 대서인도씨는 하나의 씨앗이다. 싹이 트고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사람이 60억 명이면 60억의 씨앗이 있다. 600억 명이면 600억의 씨앗이 있다. 대단한 씨앗이다. 대단한 씨다. 지상과 지하와 우주에는 많은 사람이 있다. 다 씨이다. 씨앗이다. 얼마나 잘 자랄지 얼마나 좋은 열매를 맺을지 모두 지켜보고 있다. 씨 중에 씨는 사람이고, 씨앗 중에 씨앗은 사람 씨앗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냥 식물과 동물의 씨가 아니라 사람의 씨다. 오늘 사람의 씨가 제대로 대접받는다. 사람을 씨앗으로 대접했다는 것이네. 사람의 몸은 물이 70%를 차지한다는데 정액도 사실 물이다. 물과 씨는 약간 다른 것인 데 연관성이 무얼까? 속된 말로 좆물이라고 하는데 물이 맞다. 여자의 애액을 속된 말로 씹물이라고도 한다. 물이네. 씨가 아닌데 말이야. 씹거웃, 씹두덩, 등도 여자의 생식기와 관계된 것을 이르는 말들이다. 아기는 분명히 남녀의 교접이란 과정을 통하여 생긴다. 열매는 식물의 개념인데 동물의 개념은 새끼, 사람으로는 아기란 말인가? 지구의 70%는 바다이다. 사람의 70%는 물이다. 30%는 육지이다. 30%는 물이 아닌 근육과 뼈이다. 사람의 몸 70%는 물이니 바다로 가고, 나머지 30%는 근육과 뼈이니 육지로 가라. 배합비율이 이상하다. 지구에 존재하는 많은 것인 바닷물 비율에 맞추어 취하고 적은 것인 육지의 비율에 맞추어 취했단 말이냐? 아리송하다. 오늘 대서인도는 하루가 길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하루는 상당한 시간일 수 있다. 오늘은 꽤 길다. 물 한 방울이 정액 한 방울이 여자의 자궁으로 들어가면 아기가 만들어진다. 물 한 방울이 씨앗이다. 벌이 벌집을 만들어 꿀을 저장하는데 정말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상방 15〬로 유지하여 꿀이 흘러내리지 않게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이나 동물의 여자나 암컷의 질이나 생식기도 상방 15〬로 유지하여 설계되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자의 생식기는 발기했을 때 상방 15〬 정도로 유지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정확한 것은 아니나 약간 위쪽으로 향한다. 젊은이일수록 그 각도가 높다는 것은 연관성이 있는 것도 같다. 남녀의 생식기는 몸의 가장 중앙에 위치해 있다. 신기한 일이다. 왜 가장 중앙에 위치할까? 조선팔도의 가장 중앙은 서울이고, 미국의 각주는 주도를 꼭 그 주의 중앙에 위치토록 한다. 대서인도는 오늘 벌처럼 꿀이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게 잘 시간을 보낸 것일까? 오늘이 남녀의 몸 중앙에 위치하는 그런 날인가? 미국이나 조선이 그렇게 중요한 도시를 선정하는 것은 오늘한 일일까? 벌집구조는 많이 응용하여 사용한다. 축구장의 골대의 그물망을 육각형으로 얽어매어 놓았다. 기차의 앞쪽도 육각형으로 설계해 놓았다.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 여자의 음부는 모래 때문에 평상시에는 덮여 있는 구조라고 한다.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작동하는 것이다. 거북이 마냥 머리와 발과 다리를 숨겨버리고 위험을 대비한 하루이여 오늘이란 말인가? 대서인도가 지하국가2에 와서 도읍을 정하지도 않았지만 지금 그 자리가 수도가 자리 잡는 자리가 될지 아니면 변방이 될지 그것은 계획을 하기 나름이다. 계획은 씨를 근거로 해서, 씨앗을 근거로 해서 일을 착수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거주지 근처에 물이 70%로 조성되는 것이라는 어설픈 가늠치를 세운다. 물이 70%의 넓이를 차지하는 인공의 지구를 말한다. 지하에 70%를 물이 차지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으나 지구와 인간의 몸은 70%라고 말하고 있다. 지하에 물이 70%라 답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씨앗, 싹, 열매로 결과물이 나오는데 지금의 장기기증 로고 그림도 씨앗에서 싹이 나오는 그림으로 만들어져 있다. 숭고한 장기기증이 꺼져가던 생명을 다시 살리어 새싹이 돋아나는 형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봄 잔디에 물이 오른다. 봄 보지에 물이 오른다. 좆물이 슬슬 녹는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는 식물에 진짜로 물이 오른다. 처녀들은 봄에 계절을 느낀다는 것이 속된 말로 봄처녀 봄 보지에 물이 오른다고 한다. 동물들은 암컷이 암내를 내어 수컷을 유혹한다. 물고기나 원숭이도 암컷이 혼인색을 내듯이 물고기의 몸 색깔이 변하고, 암컷 원숭이의 음부는 피가 흐를 듯이 부풀어 올라 참지 못해 젊은 수컷 앞에서 엉덩이를 들이밀고 교접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원숭이 종류에서 진화한 인간이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수컷이, 남자가 여자를 취한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어지나 암컷이 수컷을 여자가, 남자를 유혹한다고 하기도 한다. 꽃이 향기나 아름다움이나 온갖 방법으로 벌을 유인하는 방법이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벌을 유인하지 못하면 생명이 끊어진다. 수분이 안 되면 만사헛일이다. 사람도 아기를 가지기 위해선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를 유인한다는 것이 틀리지 않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수태능력이 있는 젊은 여인일수록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씨앗이나 아기가 생기기 위해선 끌어당기는 무엇이 있어야 가능하다. 아무리 남자가, 수컷이 달려들어도 암컷이, 여자가 응해주지 않으면 결과가 없다. 결국은 여자가 암컷이 반응을 하기에, 허락하기에 일이 성사된다. 대서인도가 지하국가2를 유혹하는 것은 무엇이고, 지하국가2가 상대역인 그를 유혹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국가가 인간적인 인격이 없으나 국가유기체로 본다면 생명적인 요소가 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처럼 괴물 일 수도 있다. ‘국가는 국격(國格)이 있다.’고도 한다. 나라와 개인은 누가 씨앗이고 누가 열매인지 국가의 구성원이 씨앗이고 국가가 그 열매란 말인가? 그 국가의 발전상이 싹이란 말인가? 동물로 보면 괴물이고 식물로 보면 열매인데 양자를 다 갖춘 괴물이며 열매인 것인가? 괴물이자 열매다. 국가는 괴물이자 열매이다. 인간은 동물적 요소이지만 살고 있는 지구는 무생물적 요소이다. 생물과 무생물을 아우르는 무엇이다. 국가는 인간이 살고 있는 동물적 요소와 생물적 요소, 무생물적 요소를 합한다면 괴물이며, 열매이며, 무생물적인 무엇인가? 대서인도가 있는 지하국가2는 괴물이며, 열매이며, 무생물적인 지하의 공간이다. 국가는 괴물이며, 열매이며, 공간인가? 영토, 국민주권, 국민들을 영토는 공간으로, 국민주권은 열매로, 국민들은 괴물로 바꾸어 놓은 것인가? 대서인도의 몸속에도 봄처녀처럼 무엇이 용솟음 칠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리비도의 에너지랄까? 생명의 숨소리가 그가 사는 땅, 지하국가2에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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