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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거리 만들기

주낙영 자유한국당 수석전문위원(전 경북도 행정부지사)
주낙영 자유한국당 수석전문위원
(전 경상북도 행정부지사)
대부분의 중소도시들이 도심공동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인구는 줄고 건물은 낡아 밤이 되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 장사가 잘 될 리도 없다. 한 때 취객들로 넘쳐나던 골목길도 적막강산이다. 도심공동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소위 도심재개발 사업이 많이 추진되고 있지만 원주민을 쫒아내고 임대료를 급등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상업적 이익만을 쫓아 인간을 소외시키는 재개발에서 도시재생으로의 근본적인 발상 전환이 요구된다.

구도심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걷기 좋은 거리, 걷고 싶은 길을 만들어야 한다. 물리적으로 편리할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안락감을 주는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길이 그런 길일까? 도시건축학자인 유현준은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하나는 휴먼 스케일의 체험이다. 거리를 구성하는 환경요소, 예컨대 건물, 차도, 가로수, 가로등, 간판, 쇼윈도 등이 너무 크고 웅장하면 심리적인 위압감을 주어 걷기 싫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의 테헤란로나 세종로 같은 길은 압도적 스케일로 상징성을 지닌 거리지만 우리가 걷고 싶을 때 찾는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명동이나 홍대 앞  거리는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휴먼 스케일 수준에서 다양한 체험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된다고 한다.

두 번째는 이벤트가 일어날 가능성이다. 단위거리당 상점의 출입구 숫자가 많을수록, 단위면적당 블록의 코너 개수가 많을수록 이벤트가 일어날 경우의 수가 늘어난다.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보행자 입장에서는 ‘그의 세상’을 구성하는 일이다. 어느 길을 걸어갈지, 어떤 카페에 들어갈지, 어떤 물건을 살지 수많은 이벤트에 대한 의사결정이 모여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의 세상이 구성된다. 높은 이벤트 밀도의 거리는 보행자로 하여금 의사결정의 주도권과 다양한 체험의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걷고 싶은 길이 된다. 따라서 단위블록의 크기가 작은 유럽의 도시가 한참을 걸어야 한 블록이 끝나는 미국의 대도시에 비해 훨씬 걷고 싶은 도시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 전자는 마차시대에, 후자는 자동차시대에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서울의 세종로 미국 대사관 앞거리에는 대사관 정문이 하나밖에 없어 들어가는 경우와 그냥 지나치는 두 가지의 경우만 있지만 홍대 앞 피카소 거리를 걸을 때는 선택하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다양하기 때문에 걷고 싶은 거리라는 설명이다.

일찍이 미국의 저명한 도시비평가인 제이콥스(J. Jacobs)는 1960년대 초 미국의 대도시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 이유로 그는 현대도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엄격한 용도지구제, 자동차 위주의 도로체계, 슈퍼 블록형 도시구조, 도시 교외지역의 택지개발로 인한 전통적인 도시중심부의 쇠퇴 등을 들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활기 넘치는 거리와 이웃과의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이 같은 지적과 통찰은 우리나라의 도심공동화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도심에 걷고 싶고 거리, 활력이 넘치는 거리를 만들자. 그러기 위해서는 인도의 폭을 넓히고 그 용도를 좀 더 다변화해야 한다. 불법 입간판과 적치물을 쌓아 보행을 방해해서는 안되겠지만 유럽의 거리처럼 노상 카페에 앉아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할 수 있는 거리였으면 좋겠다. 거리 곳곳에서 화가가 그림도 그리고 악사가 연주도 하는 보헤미안의 거리라면 더욱 좋은 일이다. 대신 자동차가 다니기에는 조금 불편한 도시가 되어도 좋다. 불법 주정차로 차도를 막아 보기에도 답답한 도시가 아니었으면 한다. 이를 위해 공용주차시설을 대폭 확충하고 도시교통체계를 대중교통중심으로 전면 개편해야 한다. 일본의 도야마시는 ‘경단과 꼬챙이’ 형태의 대중교통구조와 함께 승객이 도심 정류장에 내릴 경우 버스요금을 대폭 할인해 주는 제도를 통해 시민들의 도심 진입을 유도하여 도심활성화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도심 건축물의 건폐율을 완화해서 더 많은 점포가 들어설 수 있도록 해 줄 필요도 있다. 대형 주상복합건물을 짓더라도 거리와 접한 면에는 작은 소규모 가게들이 많이 배치되도록 다자인해야 한다. 단위면적당 상점의 출입구 수가 많을수록 이벤트가 일어날 경우의 수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벤트 밀도가 높을수록 길을 걸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우연성의 재미도 넘쳐난다.

걷고 싶은 거리의 또 다른 조건은 공간이 주는 역사성, 문화성, 심미성이다. 어느 도시든 거리마다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다. 수천 년 역사를 지닌 고도가 아니더라도 역사의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이야기 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유명인이 한 때 머물러 식사하고 잠을 잤던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한류스타가 출연한 영화촬영 장소였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장소에 간단한 기념물이나 홍보간판 하나라도 세운다면 명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거리에 스토리텔링을 입혀 걷는 재미를 배가시켜 보자. 도시의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가장 좋은 매개는 역시 잘 보존된 역사문화자원이다. 유럽의 도시가 품격있게 느껴지는 것은 과거와 현대의 조화, 즉 고전미가 살아있으면서도 현대적 기능성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도록 도시경관을 연출해 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간판, 이정표, 가로등, 벤치, 정류장 등 각종 시설물들에도 공공 디자인의 개념을 적용하여 간결하면서도 통일된 이미지로 도시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경주도 여느 중소도시와 마찬가지로 구시가지가 쇠락하는 도심공동화의 고민을 안고 있다. 교외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빠져나가고 도심과 관광지가 연결되지 못해 시내상가는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고도보존법을 비롯한 이중 삼중의 규제로 문화재 주변지역은 남루한 촌동네로 남아있고 반경을 조금만 벗어나면 고층아파트가 난립하여 고도의 경관을 해치고 있다. 잘못된 도시계획제도가 가져온 참담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경주는 다른 도시에 비해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들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경주는 스카이라인 보존을 위해 건물의 층고를 엄격히 제한해 왔기 때문에 휴먼스케일의 체험을 갖기에 아주 좋은 도시다. 또한 곳곳에 역사문화재가 산재하고 오래된 가게와 행사도 많아 다양한 이벤트의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대릉원, 봉황대, 황성공원 등 아름다운 녹지공간이 풍부한 것도 심미성, 쾌적성의 측면에서 큰 장점이다. 이런 장점을 살리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혜를 모은다면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멋진 시가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경주는 ‘고도 천년, 읍성 천년’의 역사를 지닌 문화도시다. 아무리 생활이 불편해도 이런 정체성을 훼손하는 성급한 개발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드는 노력 또한 다소간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거리를 만들어야 관광객이 몰려오고 도심 상가가 활성화될 수 있다. 걷고 싶은 길, 아름다운 도시는 누가 만드는가? 선진국의 성공사례에서 보듯 관주도가 아니라 결국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동의와 협조로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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