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1973년 입학 금오공고 1기와 경기고 72회의 현주소 찾아보니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wd = 270; var ht = 380; var rate = 0; if(wd>540){ rate = (540/wd); ht = ht*rate wd= 540; } </script>
<script> document.getElementById("artImg0").style.width = wd; document.getElementById("artImg0").style.height = ht; </script>
박정희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한 엘리트 공업고등학교의 대표주자는 경북 구미시 구미대로에 위치한 금오공업고등학교다.

금오공고가 문을 연 것은 1973년. 당시 1기생으로 360명이 입학했다. 학비 면제 등 정부가 파격적인 지원을 앞세워 직접 우수 학생들을 선발하면서 전국의 인재가 몰렸다.

1기는 아니지만 1976년 4기 입학생들의 성적 자료를 보면 400명 중 중학교 수석이 121명, 상위 5% 성적이 256명, 상위 10% 성적이 23명 등 1970년대 금오공고 입학생이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금오공고가 문을 연 1973년,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고인 경기고에도 746명이 입학했다. 다음해인 1974년부터 고교 평준화 정책이 시행된다는 사실이 알려진 상태에서 평소보다 더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새로 만들어진 엘리트 공고와 전통의 명문고생들은 어떤 길을 걸었고 지금 어떤 위치에 있을까.

이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답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학위 논문인 ‘중화학공업화 초기 숙련공의 생애사 연구’에 담겨 있다. 지만우씨가 작성, 지난 1월 석사학위 심사를 통과한 논문으로, 연세대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가 심사위원이었고,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가 연구에 도움을 줬다. 류석춘·김형아 교수가 함께 연구 중인 대한민국 1세대 기능공들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된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비교 분석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금오공고 1기 졸업생 360명 중 총동문회에 등록된 326명과 경기고 72기 졸업생 746명 중 주소록에 등록된 608명이다. 이들의 현 직업을 보면 경기고의 경우 대학교수가 153명(25.2%)으로 가장 많고, 이어 기업경영(96명·15.8%), 의료직(72명·11.9%) 순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금오공고 1기생들의 직업. 가장 많은 직업은 기업경영(88명·27.0%)이다. 등록된 동기 전체 중 비율로 볼 때 금오공고 출신 기업 경영자가 경기고 보다 많다. ‘기업경영’으로 분류된 기업체 대표이사 혹은 임원이 상식적으로 가장 많을 듯한 기술직(67명·20.6%)보다 훨씬 많다. 기업경영과 기술직에 이어서는 공무원(35명·10.7%), 자영업(29명·8.9%)이 많았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논문 저자 지만우씨는 “(‘기업경영’이라는 답의 대상이 된 기업은) 한국 기업데이터에 등록되어 있는 기업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기업경영’자는 경제적으로 상층이라고 볼 수 있다”며 “금오공고 1기 졸업생의 경우 농촌 빈곤층 출신으로 도시 중상층 출신 자녀들 못지않게 지금까지도 안정적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계층적 상승이동이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wd = 220; var ht = 450; var rate = 0; if(wd>540){ rate = (540/wd); ht = ht*rate wd= 540; } </script>
<script> document.getElementById("artImg1").style.width = wd; document.getElementById("artImg1").style.height = ht; </script>
공고생들을 격려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photo 조선일보 DB
금오공고 졸업생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박정희 정권이 내건 공업입국의 표본학교답게 다른 공고에 비해서도 기술이 우수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금오공고는 2급 기능사 자격증을 따지 못하면 졸업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공고생들이 3학년에 시험을 보는 2급 기능사 자격증을 대부분 일찌감치 2학년에 취득했다고 한다.

당시 2급 기능사 자격 시험은 합격률이 10~20%대에 불과할 정도로 어려웠다. 졸업 후 5년간 기술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전공 관련 실무 능력을 키웠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 5년 군복무 조건은 최초 모집요강에는 명시돼 있지 않다가 1기가 졸업하기 직전인 1975년 가을에 ‘5년 복무’가 확정되면서 많은 금오공고생의 불만 대상이 된 것도 사실이다.

금오공고 1기생인 이명재 ‘명정보기술’ 대표는 2012년 발간된 기능한국인 수기집 ‘나의 꿈, 나의 사랑, 나의 열정’에서 군에서 보내야 할 불안감 때문에 동기 3명과 함께 학교를 도망치기까지 했던 자신이 군대의 도움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군에서 영어 매뉴얼을 접하고 미군과 접촉한 덕분에 제대 후 AMK라는 미국계 회사의 하드디스크 생산 분야에 입사하게 됐고 이후 ‘매일같이 2시간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관련한 이론과 실무의 1인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90년 설립된 ‘명정보기술’은 국내 최초의 하드디스크 수리 및 데이터 복구 회사로 연 매출 450억원에 이르는 중견기업이다. <출처 ; 주간조선>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