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
- 정치
- 오피니언
- 지역뉴스
- 종합
- 코끼리회원코너
- 사람들
- 흥망과 변화, 인물과 이념의 변주곡 -
▲최기덕 (여의도 정치미디어
그룹 대표)
지금은 야당이 진보의 화신(化身)인양 떠들지만 원래 야당의 뿌리는 전라도 지주 출신의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 등이 만든 친일 보수적인 한민당 이었다. 독립운동의 거두 김구, 이승만 등이 귀국하면서 친일의 딱지가 있었던 한민당 계(系) 인사들이 우남 이승만 쪽에 붙었으나 정부수립 후 이승만 친위세력인 자유당에 밀리자 뛰어 나와 만든 당(黨)이 신익희, 조병옥 등의 민주당이었다. 해공 신익희와 유석 조병옥이 연이어 대선을 앞두고 사망하고 자유당의 독주체제가 이어졌으나 4.19 학생혁명으로 제1공화국은 무너졌고 이 바람에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고질적인 당내 내분으로 신파의 장면이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총리가 되었고, 구파의 윤보선은 명목상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제2공화국은 1년도 못되어 5.16 군사혁명으로 종지부를 찍고 박정희의 제3공화국이 탄생하였고 집권여당은 김종필이 만든 공화당이 되었다.
제2공화국 시절 장면의 신파에 속했던 김대중은 수차례 고향 목포에서 출마했으나 실패하고 부인까지 자살하는 참담한 지경이었으나 원주에서 보궐선거로 천신만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으로 국회가 해산되어 당선신고도 못하는 불운을 맞보았고, 구파에 속했던 김영삼은 장택상의 비서를 하다 27세 최연소로 부산에서 당선된 민주당의 신성이었다. 훗날의 3金, 즉 JP. YS. DJ가 모두 이때 모습을 드러낸다. 여담이지만 구세대 정치인들은 아호를 써왔고 30대의 김종필이 JP라는 영문약칭을 사용하자 김영삼은 YS, 김대중은 DJ를 사용해 이후 대권주자들은 영문 약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원래는 외무부 직원들이 김용식(YS)과 김동조(DJ) 장관을 약칭하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 내내 반대와 투쟁의 선봉에 섰던 YS와 DJ는 이후 야당의 거목으로 대통령까지 지냈지만 당시의 쟁쟁한 야당 인사들이 볼 때는 유진산이 말한 것처럼 ‘구상유취’ 즉 젖비린내 나는 신세대들 이었다. 197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YS가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며 야당의 세대교체 바람이 불어 구세대의 막내라 할 소석 이철승과 YS, DJ가 맞붙은 민주당 당내경선에서 소석계의 지지를 받은 DJ가 역전승을 거두며 화려한 ‘DJ 정치’가 시작되었다.
DJ는 야당의 대통령후보였다는 관록은 있었으나 당내 기반과 조직에서는 YS에 밀려 이후 해위 윤보선, 함석헌 등 재야인사와 어울려 장외투쟁에 몰두했고 급기야 일본에서의 반정부 활동 중 납치되어 이후 ‘10.26사태’ 까지는 동교동 집에 연금돼 있었다. 반면에 국회에 진출해 있던 YS는 끈질기게 대여투쟁을 하여 YH 여공사태, 뉴욕 타임즈 기자회견 사태 등을 일으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이 되고 이로 인해 ‘부마사태’가 촉발되어 차지철과 김재규 강온파 간 싸움의 와중에서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1980년 ‘서울의 봄’이 되자 ‘3김’은 정치활동을 재개해 JP는 구(舊) 공화당계 사람들의 추대를 받고, YS는 민주당의 전폭적 지지를 업었으나 상대적으로 원내 세력이 없었던 DJ는 재야와 학생들을 상대로 대중정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친위부대인 전두환, 노태우 등에게 거세 되어 이후 10년간 한국에는 야당은 여당의 2중대 격인 유치송의 신한당 만이 존재한다.
전두환 노태우의 민주정의당은 이후 YS의 민주당, JP의 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통해 신한국당이 되었고 이후 한나라, 새누리로 이름을 바꾸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근본적으로 군인, 관료, 법조인, 테크노크랫 등의 산업화 세력이었고 출신지는 3공화국 이후 주류가 된 경상 충청권이었다. 반면에 야당인 민주당은 DJ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세력과 재야 학생 운동권이 주축을 이루는 세력이었다.
재밌는 것은 여당인 새누리 당이 당의 색깔을 빨간색으로 바꾼 것이다. 80년대 까지는 반공이 국시였기에 ‘빨갱이(Reds)’ 란 말은 ‘금기어’였고 상대를 낙인찍는 ‘저주의 말’ 이었다. 박정희는 군(軍)내 남로당 총책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6.25 바람에 복직되었고, 그가 가장 존경하는 중형(仲兄) 박상희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공산주의자가 극성(極盛)했던 ‘대구폭동’ 중에 경찰에게 죽었으며 그 맏딸이 JP의 부인 박영옥이니 원조 빨갱이는 김대중과 노무현의 장인이 아니라 박정희 집안이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英美의 자유민주주의는 소개되지도 않았고 공산주의만이 제국주의에 맞서는 유일한 사상으로 독립운동가나 지식인의 복음(福音)이었다.
70년대까지의 여야 간의 싸움이나 재야학생의 반정부 투쟁에서는 지금 같은 이념적 싸움은 없었다. 여야는 근본적으로 보수정당이었고 오히려 국가주의적 색채의 공화당과 민정당이 자유주의를 부르짖는 야당보다 더 진보적 이었다. 이념적으로 국가의 개입과 복지를 주장하는 것이 공산당이나 사회당의 정책이고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간섭을 부정하는 것이 자유주의(Liberalism) 인데 우리나라는 이것이 반대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란 하나의 정치체계(Political method)이지 이념(Ideology)이 아닌데도 지고지선의 가치인양 혼재되어 쓰이고 있다.
신군부의 김대중 체포로 촉발된 ‘5.18 광주사태’ 이후 美문화원 방화사건이 터지면서 80년대 이후의 반정부 투쟁에 反美와 이념 성향이 노골화 되었고, 야권이 선거 전략상 학생과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선거연대를 시작하면서 주사파니 NL파니 하는 종북(從北) 성향의 운동가들이 정치권에 등장하며 제도권 정당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계속)
Copyrights ⓒ 케이투데이 & ktoday.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