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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달과 고분들

김청수

얼굴 없는 영혼들
바람으로 다녀가신다

풍경 소리 참, 맑다
보름달 참, 환하다

죽은 엄마 우물 고경(古鏡)에
얼굴 비추어 보나 보다

고향의 우물은 달빛 아래 서럽도록 넘치고
줄초상(初喪) 난 골목길
발걸음 소리조차 조심스럽던 밤

홀로 자두나무 밑을 서성이다
주산 고분들 돌아오는 저녁

깊숙한 비밀, 지하문 닫아걸고
세월 따라 흘러왔을 그 고분
향 하나를 피우며

바람과 달과 고분들의 이름을 되뇌어보는
엄마와 그 달 아래 걸어 보는 밤

  


김청수 시인과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고령 주산(311m)을 걸은 적이 있다. 능선을 따라 물안개가 자욱이 끼어 혼몽하였다. 고대 대가야시대의 그 고분들 속에서, 금방이라도 귀혼(鬼魂)들이 걸어 나와 빗물 속에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봄철 철쭉꽃이 빗물을 물고 요상하게 피어 앉아 있었다. 정상가는 길옆으로 영산홍과 자잘한 들꽃들이 만발한 것이 기억난다. 고분 둘레 길을 산책하면서, 세 살 때 돌아가신 시인의 어머니에 대해 들었다. 유난히 손재주가 좋아 자수(刺繡)가 고왔다고 하였다. 온 동네 옷감을 도맡아 색실로 꽃무늬를, 제일로 곱게 수놓으셨다고 하였다. 자당(慈堂)의 이야기만 나오면, 그는 목소리부터 젖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서러운 심회를 봄비 속에 끌고나와, 주산 정상까지 산책하였다. 능선 따라 뿌연 북서쪽으로 가야산과 미숭산의 노을이 좋다며, 언제 쾌청한 날 다시 함께 오자고 하였다. 산 아래 안개 사이사이엔, 고령읍이 수묵화의 선염법으로 군데군데 먹물이 번져있었다. 시인은 나무 벤치에 기대 그의 애잔한 서정시「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지요」를, 그 봄비 오는 고분 곁에서 들려주었다. 곡진한 시인의 목소리는 봉분 주위를 돌며, 꽃잎처럼 비바람에 떨리고 있었다. 마치 시인의 어머니가 낙동강을 타고 올라와 무덤가를 서성거리고 있는 듯 여겨졌다. 
 

김청수 시에서 어머니는, 고향의 달이자 주산의 고분이자, 세 살 때 병(病)으로 돌아가신 엄마의 서러운 눈물이기도 하다. 누구나 모(母)의 부제는, 문득문득 사무친 그리움이 된다. 5시집『바람과 달과 고분들』(2019, 시와 사람)의 표제시인,「바람과 달과 고분들」속에는 참으로 깊고 높고 아픈 시인의 외로움이, 시 행간마다, 연과 연마다 쓸쓸하다. 그렇다. “김청수의 시에서는 어둡고 빈 공간에서 올려오는 풍경소리 같은 게 들린다. 간밤에 어머니가 다녀가신 듯한 느낌. 그래서 그 부재에 대한 쓸쓸함이 깔려있다. 그런 풍경에 맞물려 시집의 표제로 삼은「바람과 달과 고분들」은 시인에게 요긴한 쓰임의 존재가 아니라 그냥 거기에 있는 무용(無用)의 대상이며, 죽음과 떠남 그리고 쓸쓸함을 환기시킨다. 예컨대 얼굴 없는 영혼들이거나 스키는 바람과 풍경소리 또한 하늘에 높이 떠서 닿을 수 없는 보름달 같은 것들이며, 엄마도 우물(古鏡)에 비친 얼굴처럼 만질 수 없는 영상일 뿐이다. 그리고 아침에 탁발승처럼 찾아온 새가 독경을 하듯 매실나무에 걸린 문장을 읽고 가는 것을 바라보며 시인은 나뭇가지가 바로 생이고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찌보면 우리는 그 나무에 잠깐 날아와 가지 (생과 길의 문장)를 쪼다가(읽다가) 가는 새(「탁발승」)처럼 어디론가 떠나가는 존재들이다. 그런 뜻에서 김청수 시인에게 삶이란 “허공을 향해 아주 조그맣게 흔들었을 종소리”(「목어」)이며 시는 그것을 받아 적은 짧은 문장이다.“(이진흥 표사)


1962년 경북 영덕 구계항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1994년 『문학세계』로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2020년 『문장21』에 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구멍』, 『처녀와 바다』, 『깍지』, 『빠스각 빠스스각』, 시선집 『고흐의 시』,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평론집 『시에 미치다』, 동시집 『우리나라 연못 속 친구들』, 『태양 셰프』출간하였으며, 시평론 대담집 『저녁의 詩』를 편저했다. 대구예술상(2015), 고운 최치원문학상 대상(2018), 대구문학상(2018), 영남문학상 수상(2020)을 수상했다.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역임, 대구문인협회 이사, 한국시인협회원, 대구아동문학회원, 『텃밭시인학교』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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