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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집이 없다 -김순재(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지난여름, 서울 집은 집이 아니었다. 집값은 미친 듯이 올랐고 덩달아 사람들도 제 정신이 아니었다. 집을 사겠다고 전화 한 통화 할 때마다 1천만 원씩 뛰었고, 집 보러 갈 요량이면  다음날 5천 만 원이 올라있었다. 집 구경은 고사하고 문의 전화 조차 두려울 지경이었다. 투기판이 따로 없었다.   
 

집은 말 그대로 ‘돈’이었고, 그 돈을 쫓는 사람들의 치열한 사냥감이었다. 아이들이 나서 자라고 부모들이 나이를 먹고 마지막을 편안하게 보내는 따뜻한 곳이 아니라, 쟁취해야 되는 힘겨운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집은 온기가 사라진 채 껍데기만 요란한 텅 빈 공간으로 변해갔다. 사람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집에 집이 없어졌다. 집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기능만 할뿐 그 뼈대와 내용들이 하나씩 사라진 것이다. 먼저 안방이 집을 나갔고 이어 사람들이 모이는 마루와 마당이 집을 떠났다. 죽음마저 집을 나갔다. 안방이 집을 나가자 집에서의 출산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병원에서 태어나고 산후 조리조차 집을 떠나 이 골목 저 골목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뒤이어 마루가 집을 나갔다. 번듯한 소파나 멋진 인테리어가 거실을 그득 채우고 있으나 여기에 앉아야할 이웃들이 사라졌다. 집들이 행사는 없어진지 오래요 집에 손님이 오거나 집에서의 모임이 사라졌다. 남의 집 방문은 예의 없는 일이고, 손님맞이는 번거롭고 되도록 피하고 싶은 일이 됐다. 이웃이나 친구가 오지 않는 집이 되었다.
 

마당이 없어지자 이번에는 잔치가 집을 떠났다. 아이들의 백일잔치와 돌잔치는 물론이고 결혼잔치 환갑잔치 칠순잔치도 집을 나갔다. 동네사람이나 친지들이 마당에 모여 푸짐한 음식과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며 웃는 떠들썩한 잔치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노인들도 아픈 사람도 한꺼번에 집을 나갔다. 어느새 집은 젊고 건강한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죽음이 집을 나갔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죽음의 76%(2017년)는 병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외국의 경우 병원에서의 사망은 네덜란드 29% 스웨덴 42% 미국 43%로 한국보다 월등히 낮다. 우리의 죽음은 오랫동안 살아서 익숙하고 편안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죽어가고 있다. 죽음조차 외롭고 고단하다. 이문재 시인은 ‘죽음이 집밖으로 나가 죽었다/ 집이 집을 나가자/죽음이 도처에서/저 혼자 죽어가기 시작했다/ 죽음이 살지 못하고/ 저 혼자 죽기 시작했다/라고 했다.
 

그 옛날 우리네 집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었으나 따뜻하고 이웃과 정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집은 편해지고 넓어졌으나 이웃의 발걸음은 뜸하고 잔치가 없는 삭막한 장소가 되었다. 심지어 부모들까지 자식 집에 가는 것이 어려운 그런 집이 됐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집 나간 집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책이 많은 사람들은 일주일에 요일을 정하여 동네 주민에게 도서관처럼 집을 오픈한다. 이웃들이 집에 모여 책도 보고 정보도 교환하는 식이다. 마당 넓은 집들은 마당을 개방해 잔치를 불러 모으고 있다.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 인생을 버라이어티 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오디오 기기가 좋은 주민은 이웃들과 음악 감상을 함께 하기 위해 대문을 활짝 열었다. 사람냄새가 나는 집이야말로 ‘진짜 집’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연말이다. 망년회 장소를 고민하는 대신,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각자 음식을 준비해 집에서 연말모임을 가져보면 어떨까? 모처럼 집안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나고 현관이 시끌벅적한 사람냄새 나는 집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집에 집이 있는, 그런 집이 그립다.

(동일문화장학재단 협찬)  



김순재 학력 및 경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현), 전 매일신문 편집부국장, 경북대 문리대 영문과졸, 계명대 여성대학원 소비자학과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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