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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쉬운 도시를 만들자

주낙영 전 경북도 행정부지사

주낙영 전 경북도 행정부지사

내용은 좋은데 읽기 어려운 책이 있다. 활자가 작고 줄 간격도 좁아 눈이 쉬 피곤해 지는 책이다. 반면에 읽기 쉬운 책도 있다. 구성이 깔끔하여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책이다. 편집과 디자인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읽기 쉬운 도시(legible city)가 되어야 한다. 도시의 거리구조와 공간배치, 디자인이 잘되어 시민과 외지인들이 차를 타거나 걸을 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도시가 되어야 한다.

얼마 전 한 지인이 경주에 가족들과 휴가여행을 갔다가 길 찾기가 너무 어려워 고생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경주를 마음껏 즐겨볼 요량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주요 관광지를 돌아보려고 했는데 정류장의 안내판을 보고서는 도무지 어떤 버스를 타고 어떻게 가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를 했단다. 코스별로 시티투어 버스가 있는데 그걸 왜 이용하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짜여진 여행은 별로 재미가 없지 않느냐는 반문이었다. ‘그럼 할 수 없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까다로운 취향의 관광객들에게까지도 편리한 도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사실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는 모든 도시가 다 낯설고 읽기 어려운 법이다. 특히 옥외 광고물이 어지럽고 교통표지판도 복잡한 우리나라 도시들은 대부분 읽기 어려운 도시에 속한다. 관광도시 특성상 이정표나 안내간판 정비에 비교적 많은 신경을 써 온 경주도 그리 읽기 편한 도시는 아니다. 그럼 읽기 쉬운 도시란 어떤 도시일까? 한마디로 눈에 잘 들어오는 도시를 말한다. 이방인이 도시의 방향과 위치를 확인하는데 필요한 요소가 복잡하지 않고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도시를 말한다.

도로이정표를 예로 들어보자. 사거리 교차로라고 할 때 동서남북 네 방향이 어느 지점을 안내하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 운전자가 여유있게 갈 방향을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에, 적당한 크기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정표의 색상, 활자의 크기, 서체, 글자간격 등 모든 것이 가독성이 높게 배치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도로이정표는 어떤가? 좁은 면적에 너무 많은 정보를 담으려고 하니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더욱이 외국인을 배려한답시고 한글. 영어, 중국어, 때로는 일본어까지 병기를 하니 눈이 어지럽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외국어는 국제공용어인 영어 하나만 쓰면 어떨까? 외국관광객이 한국인 가이드 없이 직접 차를 몰고 시내를 다니는 일은 드물다. 도보 여행자라면 영어 알파벳을 찬찬히 읽어만 보아도 목적지를 찾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옥외광고물의 정비도 시급한 과제다.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우리나라 간판처럼 어지럽고 복잡한 곳은 없다. 저마다 자기 상점과 상품을 알리려고 남보다 더 크게, 남보다 더 눈에 띄게, 남보다 더 자극적으로 뽐내기 경쟁을 하고 있다. 광고수단도 다양해져서 풍선형, 바람개비형 등 각종 이동형 광고물이 보행을 방해하고 현수막, 입간판 등 저질 불법 광고물이 홍수를 이루어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옥외광고물은 주목성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도 있지만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어 길을 안내하고 목적지를 찾아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건축물의 품격을 높이고 도시미관에도 큰 영향을 미처 도시의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유서깊은 유럽 도시의 건물에는 화려한 옥외광고물이 거의 설치되어 있지 않으며, 간판의 색상과 규격, 재질도 문화재가 많은 시내 경관을 고려해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다.

각종 문화재의 안내판은 더 가관이다. 규격과 재질, 서체도 통일되어 있지 않고 어떤 것은 비바람에 활자가 벗겨져 읽을 수가 없다. 내용이 어려워 이해하기조차 힘든 것도 많다. 고건축의 독특한 양식을 전문용어로 장황하게 기술해 놓았으니 어지간한 인내심 없이는 끝까지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외국인을 위해 영어나 중국어로 번역을 해 놓았는데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오역에 오탈자 투성이다. 그것을 번역한 사람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번역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글세대에 비전문가인 일반 관광객들을 위해 좀 더 쉽고 간단하게 설명문을 쓸 수는 없을까? 스토리텔링 위주로 재미있게 문화재를 설명해 준다면 더 기억에 남을 것이다. 좀 더 전문적인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QR코드를 이용해 스마트폰으로 내용을 검색해 볼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세계의 많은 도시들이 읽기 쉬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영국의 런던이 대표적이다. 런던은 가로개선 뿐 아니라 정확하고 다양한 보행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읽기 쉬운 런던(Legible London)’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다. 영국의 브리스톨(Bristol)이라는 작은 도시도 1990년대 중반 ‘읽기 쉬운 도시’를 표방한 이후 세계적인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의 요코하마도 ‘미나토 미라이 21’ 프로젝트를 통해 매력적인 디자인 시티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하였다. 서울시도 최근 독자적인 서울서체를 개발하고 각종 가로표지판에 이를 적용함으로써 도시가 한결 세련되고 깔끔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 도시의 공통점은 도시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새로운 서체와 색상을 개발하여 안내판 등 공공 디자인에 일관되게 적용한 것이 그 특징이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경주는 특별히 읽기 쉬운 도시가 되어야 할 당위성이 크다. 관광객들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읽기 쉬운 장치들을 통해 걷는 행위를 도와주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이방인의 시각에서 불편함 찾기다. 무엇을 개선하면 그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을지 선진 도시들을 벤치마킹 하면 된다.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가로환경을 개선하면 부동산 가치가 올라 궁극적으로 시민들에게 득이 된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일을 추진함에 편리성, 기능성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거리의 이정표, 간판 하나를 바꾸더라도 고도 경주의 이미지, 정체성에 어울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만큼 예술성, 심미성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고도 경주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자. 그 지름길은 읽기 쉬운 도시 만들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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