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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순 정치평론가 |
대선을 불과 27일 앞두고 선거판이 요동치고 있다.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문재인 대세론이 모두를 압도했다. ‘이대문’(이대로 가면 대통령은 문재인),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의 대세론을 앞세워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은 ‘국가대청소’와 ‘적폐청산’의 깃발을 휘둘렀다. 문재인 후보의 대세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적폐’로 몰리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3일 민주당(문재인), 4일 국민의당(안철수)이 대선후보를 결정하자 여론의 흐름이 영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그제 월요일 각종 언론사에서 발표한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다자대결구도에서도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후보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다. 상당수 조사는 오차범위 내에서 안 후보가 문 후보를 앞선다. 양자대결구도에서는 안 후보가 오차범위를 벗어나 앞서고 있다.
사실 이런 극적인 반전의 분수령은 지난 3월31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수감이다. 박 전 대통령의 구속으로 한 시대가 마감됐다. 지난해 10월24일부터 벌어진 ‘최순실 게이트→국회의 탄핵소추→헌재의 파면결정’ 드라마가 이제 끝났다. 그 다섯 달 동안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 허탈감, 분노에 따른 반사이익을 오롯이 누렸던 정치인이 바로 문재인 후보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의 추이를 살펴보면 이런 추론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을 포함한 첫 조사(2016년 6월) 때는 ‘반기문 26%-문재인 16%-안철수 10%’의 순서였다. 이 같은 흐름은 지난해 10월 둘째 주 조사 때까지 큰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12월9일 박 전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된 후인 올해 1월 조사에서는 ‘문재인 31%-반기문 20%-안철수 7%’로 이른바 ‘문재인 대세론’이 형성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반사이익의 이유가 사라졌다. 통상 선거는 회고적 투표와 전망적 투표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현 정권에 대한 응징 성격의 회고적 투표와 차기 정권에 대한 기대로 하는 전망적 투표,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되고 구속됨으로써 사실상 응징이 이루어졌다. 남은 것은 어느 누가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유권자들의 가슴을 울리느냐이다.
정치평론을 하는 입장에서 이번 19대 조기대선만큼 흥미진진한 경우도 없다. 현실 정치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훌쩍 뛰어넘는 그 많은 변수들이 이토록 짧은 시간에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우선 69년 헌정사에 현직 대통령이 탄핵되고 파면되어 구속된 적이 있었던가.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라 아예 뒤집어진 운동장에서 경쟁이 이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호남=전략적 선택’과 ‘충청=캐스팅 보트’의 전통적인 선거방정식이 사라지는 현상이다. 이번 대선에서 전략적 선택을 강요받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캐스팅 보트의 결정권을 쥐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대구·경북(TK)이다. 1987년 13대 대선 이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고민을 해야 하고 또 대선의 승패를 결정짓는 지렛대를 갖게 된 것이다.
세간에 나도는 ‘홍찍문’(홍준표 찍으면 문재인 된다), ‘안찍박’(안철수 찍으면 박지원이 상왕이다), 이 말들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이들이 바로 TK 유권자들일 것이다. 그만큼 TK의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이번에는 아예 기권하겠다는 말까지 횡행한다. 7일자 한국갤럽조사에 따르면 이번 대선에서 ‘꼭 투표하겠다’는 응답이 전국 평균 87%인데, 유독 TK만 74%로 가장 낮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을 수 없다. 근대사법의 대원칙이다. 투표는 바로 유권자의 권리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기권은 스스로 자신의 영향력과 위상을 깎아내리는 행위다. 전략적 선택, 이 순간에는 해야만 한다. 그래야 미래가 있다. 캐스팅 보트의 위상을 갖는 것도 미래를 위한 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