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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구 편집인<전 매일신문 편집국장> |
학자들은 민주주의의 출발점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인 아테네에서 찾고 있다. 이른바 아테네식 민주주의는 입법과 행정에 대한 결정을 유권자가 직접 행하는 투표에 의해 결정한다. 이를 직접 민주주의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선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을 한곳에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국민의 대표를 뽑는 대의정치(代議政治)이다, 이 제도는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도입, 운용한다. 우리나라도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의원 등을 뽑아 그들에게 정치를 대신토록 하고 있다.
이런 대의정치가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잦은 실패를 한다. 우리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실패의 이유도 다양하다. 먼저 국민에 의해 뽑힌 정치인들의 자질에서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뇌물 등 범법 행위를 저지르는 경우가 빈발, 대의 집단의 도덕성 부재가 대의정치 실패로 이어진다. 현대사회가 갖는 가치의 다양성으로 유권자와 대리인 간의 사고 격차가 생겨난다. 이런 격차는 민의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민의 반영 방법도 제각각이 된다. 그래서 민의가 제대로 반영될 수가 없다. 역시 실패가 된다.
선거와 정당정치의 폐해도 대의 정치를 실패로 끌고 가는 이유다. 정당 간 대립이 격화되면서 국민 민생에 관한 관심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렇다고 대리집단에 대한 사후 통제도 사실상 불능이다. 다음 선거 때까지 대리 정치인을 견제할 방법은 없다.
최순실 국정 농단사태를 놓고 보더라도 우리의 대의정치가 기능적으로 실패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통령과 국회가 법과 원칙에 따라 사태의 진실을 엄중히 밝혀야 함에도 정치적 협의 한번 없이 사태를 혼란으로 몰아왔다.
특히 사태 해결의 주도권을 쥔 야당의 태도는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았다. ‘국회’라는 법적인 ‘정치의 장(場)’이 있음에도 ‘광장’을 ‘정치의 장’으로 사용했다. 촛불민심이 마치 자기들 것인 냥 힘의 정치에만 의존했다. 침묵하는 다수의 국민이 불안해하는 모습은 애초부터 염두에 없었다. 오히려 선동 정치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본심만 드러냈다.
대의정치가 해야 할 일을 촛불을 밝혀든 거리정치가 맡은 꼴이 됐다. 야당 스스로는 국정농단 사태를 해결할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음을 시인하는 모양새가 됐다. 국민이 촛불을 들더라도 이를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당이 정략적으로 이득만 얻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탄핵 이후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국회에서 성사되든 그렇지 않든 탄핵이후 불어올 후폭풍에 대해 걱정하는 것도 민주주의 정치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탓이 크다.
만약 탄핵이후에도 지금과 같이 거리정치가 활개를 친다면 한국의 대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이 선례가 돼 앞으로 있을 또 다른 정치적 이슈에 거리정치가 대의 정치를 대신한다면 국가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거리정치가 대의정치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리정치는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대통령의 즉각적인 사퇴 주장만 있을 뿐 현실의 문제를 따질 논리성은 없다. 있을 필요도 없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그들에게는 없다.
거리정치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담아내는 것은 정치권의 몫이다. 지금은 야당의 몫이다.
거리정치를 잘 듣고 제도권으로 수렴해 가는 것이야 말로 대의정치의 본질을 살리는 것이다. 촛불 민심은 야당에게 영원히 머무는 게 아니다. 국정의 공백과 정치적 혼란을 줄여 국민들이 안심하고 자기 자리에 돌아가 일할 수 있도록 정국을 안정시켜 주는 것이 지금은 매우 중요하다. 정치인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도 여기서 생긴다. 그래야 대한민국 대의 정치의 미래도 밝아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