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마 고랑 사이
할미꽃 핀 하얀 할머니
톡, 톡, 톡, 세 발 자동차를 몬다
뒤뚱뒤뚱
운전이 불안한 늙은 몸
힘겹게 노란 선 물고 간다
병아리 물 먹듯 하늘 한번 쳐다보고
등 세 번 두드리곤
또, 끌고 간다
빨간 신호등 켜진 줄도 모르고
관절마다 삐걱삐걱
소리통 달고 간다
새끼들 집 집마다
태워주느라
몸체는 낡아 등골은 흔들리는데,
앉을 때도 일어설 때도,
‘아야야’
시동 꺼지는 소리 절로 따라 나온다
비 예보라면
고기압도 저기압도 다 겪은,
오보 한번 없는 할머니
평생 몰고 다닌 대가로,
폐차 직전 달랑
일기예보 면허증 하나 땄다
서정시는 개인이 걸어온 뒤쪽 풍경의 오솔길이다. 보름 달빛을 먹고 자란 아이는 얼마나 감성이 풍요로울까. 아침마다 산 위로 붉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 아이는, 얼마나 행복할까. 겨울 흰 눈이 지붕을 덮고, 장독대와 마당을 덮고, 온 동네를 백설의 세상으로 바꾼 풍경을 보고 자란 사람은, 얼마나 멋진 시인이 될까. 좋은 시인은 들꽃에게 말을 걸고, 그 꽃의 사연을 시 행간 속에 풀어 놓을 줄 안다. 오랜 응시와 체험을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로 작은 세계를 그려낸다. 서정시는 설렘의 언어다. 매화 꽃잎들이 빗물을 받아먹는 풍경이 좋은 서정시다. 파란 하늘이 그냥 좋고, 흘러가는 구름이 그냥 좋고, 저녁노을이 산정에 물드는 것이, 그냥 좋은 사람은 이미 시인이다. 서정시는 그리워하는 것들을 불러내는 작업이다.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까맣게 잃어버린 기억들을 복원하는 작업이 서정시다. 하여, 서정시는 두고두고 읽어도 또 보고 싶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포근함이 있다. 언어는 시의 길 위에서 깊어진다. 봄꽃의 자태도 곱지만, 황혼의 산책은 더욱 아름답다. 시는 개인의 상황에 따라, 주체나 객체에 따라 달리 표현된다. 시의 표정은 매순간 메시지로 드러나고 이미지로 확장된다. 시는 인간의 고락(苦樂)과 추억의 은유를 통해 빛난다. 시는 현실의 투영이자 오감의 발원이다. 시는 사물의 실존을 통해 늙음을 객관화한다. 다양한 땅의 말을 불변의 언어 속에 가둔다. 천지 만물은 길에서 태어나 길 위에서 죽는다. 시의 첫 행이 청춘이라면, 마지막 시구는 독거(獨居)이다. 시는 때로는 형이상학으로, 때로는 형이하학으로 전이된다. 절박한 고독은 시의 늑골을 찌른다. 하여 시는, 길 위에서 자신의 욕망을 반추하는 거울로 비유된다.
정범효의 시집 『꽃인지 나비인지』(2023, 그루)속의 중요한 또 다른 주제는 ‘늙음’에 대한 깊은 사색이다. 그는 공직 생활을 마치고 인생 2막을 설계하면서, 그 옛날 이루지 못한 문청의 꿈에 도전한다. 기타와 시작(詩作)을 병행하며, 예술의 다채로운 세계에 흠뻑 취한다. 시 공부를 하면서 그가 다짐한 일은, 하루에 한 편씩 좋은 시를 필사하는 일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시를 통째로 외운다. 어느 날 불현듯,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기억의 서랍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일상 속에 시가 무진장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시 역시 음악의 선율처럼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투고한 제1회 《오륙도신춘문예 》 당선(2022년)은, 그의 시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면허증」은 제1회 《오륙도신춘문예 》 당선작이다. 고령화 사회의 고독한 인간상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늙은 할머니의 백발을 고랑마다 핀 “할미꽃”으로 은유한 시법은 적확하다. 또한 지팡이를 쥔 늙은 몸을“세 발 자동차”로 비유한 이미지는 절묘하다. “몸은 시대마다 다르게 읽힌다. 몸은 시대의 프리즘이다. 누가, 어떤 시선으로 비추는가에 따라, 변화한다. 몸은 유리이고, 거울이고, 무성한 숲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몸은 파편이고, 대상이고, 간혹 주체이다. 몸은 거듭난다. 새롭게 해석된다.” (금은돌) 시는 시인의 상상력과 언어를 통해 새롭게 해석된 공간으로써 존재한다. 노인의 몸을 자동차로, 현대 사회의 불안한 늙음의 경고를“노란 선”으로 묘사한 것 또한 예리하다. 속도와 자본의 시대는 삶도, 죽음도, 간단치가 않다. 하여, 노인들은 날마다“빨간 신호등”앞에서‘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를 자문(自問)하게 된다.“새끼들”을 키우느라“등골이 흔들려도”, 늙은 몸 “시동 꺼지는 소리”가 절로 나도, 고독하게 살다 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정범효의 「면허증」은, 나날이 천박(淺薄)해져 가는 사람살이의 마지막 죽음 풍경을 쓸쓸하게 그렸다. 폐차 직전인 늙은 몸을 “일기예보 면허증”이란 시적 발상으로 함축한 시법은, 실로 놀라운 형상화이다.
이번에 출간된 정범효 시집 『꽃인지 나비인지』속에는 다양한 주제의 시들로 짜여져 있다. 가야산과 황강을 배경으로 펼쳐진 선비들의 시담(詩談)은 격조가 높다. 언제나 그는 구체적 현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편들을 직조한다. 부모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향수, 어린 날 놀던 또래들과의 추억, 타향에서 겪은 외로움이 행간에 가득 적혀 있다. 그의 시가 울림과 감동이 있는 까닭은, 생명에 대한 따스한 사랑이 깔렸기 때문이다. 하여, 그의 시는 합천 고향 뒷산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어린 날 춘당(春堂)의 지게에 올라타고, 밭두렁 논두렁 위에서 사랑가를 부르기도 한다. 자당(慈堂)을 모시고, 시인은 충주호 “장회나루”에 배를 띄워 “어화 둥실” 어깨춤을 춘다. 그의 시는 저녁 무렵 산사의 풍경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영월” “장릉”을 돌며, 비운의 단종과 한(恨) 많은 정순왕후를 위해 곡비(哭婢)가 되기도 한다. 그의 시는 “동양화 한 폭 / 화선지에 그리는 듯” 애틋한 사랑의 “발묵”이 노을빛으로 번진다. 정범효의 시의 특징은 서정을 통해 기억과 추억을 복원한다. 그의 놀라운 서정 시편들은 삶의 편린들을 자기류로 노래하는 독창적 시안이 있다.
|
김동원 시인 |
1962년 경북 영덕 구계항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1994년 『문학세계』로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2020년 『문장21』에 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구멍』, 『처녀와 바다』, 『깍지』, 『빠스각 빠스스각』, 시선집 『고흐의 시』,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평론집 『시에 미치다』,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태양 셰프』출간하였으며, 시평론 대담집 『저녁의 詩』를 편저했다. 대구예술상(2015), 고운 최치원문학상 대상(2018), 대구문학상(2018), 영남문학상 수상(2020)을 수상했다. 대구시인협회부회장 역임했으며, 대구문인협회 이사, 한국시인협회원, 대구아동문학회원, 『텃밭시인학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