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쳐다본 빌딩 숲
가물가물 높은 벽면에 매달려
건들건들 건물을 닦는 남자
아무나 할 수 없는 희소성만큼이나
내려다보는 어지러움
목숨을 저당 잡은 줄
풀었다 조였다
허공에 투망질 하는 거미처럼
줄 하나에 매달린 것은
그 줄이 밥 줄이기 때문이지
노을빛에 흠뻑 젖어
비단 실을 뽑으며 낙하한 그는
날개 없이 비행하는 공중 조종사
모두 쳐다보네요
혹시 소원 있나요?
-땅에 발붙이고 사는 거죠
임향식의 2시집『겨울꽃 혹은 불청객』(2023, 그루)은, 크게 ‘전통과 현대’란 두 개의 시선과 만난다. 서정의 감성과 아름다운 울림은 그녀 서경과 서정의 중심축이다. 전자는 사랑과 이별, 고향과 동무들, 여행과 단상(斷想), 바람과 구름의 이야기를 묘사한다면, 후자는 놀라운 이미지와 현대적 미의식이 투영된, 세련된 은유의 시법으로 노래하고 있다. 물론 이런 시적 아름다움은 원숙한 그녀만의 독창적 무늬이겠지만, 법고창신의 조화미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녀의 이번 시집은 시어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다. 그녀의 색깔로 기억과 추억을 불러내는 방식은, 노년의 여유가 느껴진다. 그녀는 바람에게 첫사랑의 아픔을 털어놓기도 하고, 달빛 아래 그 눈물을 주워 담기도 한다. 행간에 일어나는 미묘한 감정을 그녀만의 언어로 교직한다. 사물의 말을 여인의 우울로 곱게 채색화한다.
그녀의 시는 ‘돌아보다 문득, 만난 풍경’의 추억이다. 사랑과 이별의 엇각은 처녀의 시간과 슬픈 기억의 무늬를 새겨놓는다. 어떤 풍경은 황량한 겨울 칼바람 속에 흔들리는 억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또 어떤 풍경은 바지랑대 꼭대기에 선 아비의 말씀과 장독대를 닦고 계신, 그 옛날 고향 집 어미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편 그녀는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한다. 어디에도 끄달리지 않는 그녀만의 자유를 추구한다. 흰 구름같이, 자잘한 풀꽃같이, 맑은 시인의 마음으로, 사물에 감정을 이입해 투명한 문체로 건너간다. 어쩌면 시는, 언어의 요리에 비유된다. 사물의 이름, 맛, 향, 미각 등 섬세한 재료의 성질은, 시인에 따라 다양하게 요리된다. 좋은 시는 신선한 언어로 만든 풀코스로, 행과 연 사이를 감동과 반전으로 몰고 간다. 임향식의 시는 그녀만의 독특한 느낌과 분위기가 전편에 스며 있다. 그녀 시의 요리는 감성에 버물린 식감으로 맛을 돋운다. 물론, 기본 메뉴는 전통 서정의 다양한 변주이며, 따문따문 현대시의 레시피가 이미지로 각인된다.
특히 시「밥줄」은 시적 발상이 뛰어나다. 어쩌면 우주의 생명은 밥줄에 매달려있는 것은 아닐까. 저 무수한 밤하늘 별들도 제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숲속 은사시나무잎들이 달빛의 고봉밥을 떠먹고 있는 듯 보인다. 이렇듯 삼라만상은 저마다 밥줄을 잡기 위해 밤낮없이 ‘밥’을 찾아 헤맨다. 아마 서정시의 본질은 밥줄을 중심으로 얽혀 사는 인간의 곡절인지도 모른다. 태초의 동굴 속 아버지도 식구의 ‘밥’을 해결하기 위해, 황량한 들판을 종일 헤매었으리라. 그런 가장의 밥 찾기에 대한 고뇌를, 새벽마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은 아내일 것이다. 자식은 밥줄로 부모와 연결된 질긴 천륜이다. 하여,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식구를 위해 “가물가물 높은 벽면에 매달려” 밥줄을 타고 오른다.
그녀가 “무심코 쳐다본 빌딩 숲”속의「밥줄」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건들건들 건물을 닦는 남자”다. 그 남자는 “목숨을 저당” 잡힌 “줄”을 잡고, “풀었다 조였다” 거미처럼 “줄 하나에 매달린”채 밥벌이를 하고 있다. 아래로 내려본 그 삶의 절벽은 아찔하다. 서정시가 귀한 이유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있기 때문이다. “노을빛에 흠뻑 젖어 / 비단실을 뽑는” 남자의 소원은 “땅에 발붙이고 사는 거”란다. 마지막 구절은 참 쓸쓸하고 귀하게 다가온다. 임향식의 밥에 대한 사유는, 그녀 시에서 보기 드문 주제다. 이런 그녀 시의 형식과 내용은 개인적 서정에 머물지 않고, 사회망에 접속되어 확장된다. 인간사회의 허(虛)와 실(實)을 ‘밥줄’에 꿰어, 근본적 성찰과 문제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1962년 경북 영덕 구계항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1994년 『문학세계』로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2020년 『문장21』에 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구멍』, 『처녀와 바다』, 『깍지』, 『빠스각 빠스스각』, 시선집 『고흐의 시』,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평론집 『시에 미치다』,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태양 셰프』출간하였으며, 시평론 대담집 『저녁의 詩』를 편저했다. 대구예술상(2015), 고운 최치원문학상 대상(2018), 대구문학상(2018), 영남문학상 수상(2020)을 수상했다. 대구시인협회부회장 역임했으며, 대구문인협회 이사, 한국시인협회원, 대구아동문학회원, 『텃밭시인학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