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학창시절부터 많이 들어왔던 사자성어 중에 새옹지마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새옹지마는 변방(국경지역)에 사는 늙은이의 말 이야기라는 뜻인데 여기에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중국 어느 변방에 한 노인이 살았는데 그 노인에게는 유일한 전재산인 말이 한 마리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말이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 노인에게 전재산인 말이 달아나 버렸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냐고 위로를 했지만 그 노인은 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사람이 어떻게 알수가 있냐고 하면서 덤덤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다 얼마후 가출하였던 말이 다른 암컷말을 한 마리 데리고 집으로 돌이온 것이다. 이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잃어버린 말도 돌아왔고 한 마리가 더 생겼으니 얼마나 좋겠냐고 하자 그 노인은 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사람이 어떻게 알 수가 있냐고 하면서 덤덤하게 말을 하였고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후 얼마의 시간이 흘러 그 노인의 외동아들이 새로 들어온 말을 길들이다가 말에서 낙마하여 다리 병신이 되어 버렸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큰일 났다면서 노인을 위로하자 그 노인은 아무런 동요 없이 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사람이 어떻게 알수가 있냐고 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 노인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몇달이 지나가고나서 나라에는 큰 전쟁이 벌어져 그 동네 몸이 성한 젊은이들은 모두 전쟁터에 강제로 징집되어 나가서 모두 죽고 말았으나 그 다리병신 아들은 군인으로서 쓸모가 없어 징집에서 면제되었고 그 이후로 천수를 누렸다는 이야기이다.
사건과 사물은 모두 입체적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자신의 입장, 위치나 포지션에서 바라다보는 프레임(인식틀)으로 사물과 사건을 보게된다. 따라서 그 반대편이나 위 또는 아래에서 볼 수 있는 또다른 실체적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짧은 단편적 판단이 진실이고 전부인양 착각을 하는 것이다.
전재산인 말이 집을 나간 것, 그 말이 다른 말을 데리고 돌아온 것, 아들이 새로 들어온 말을 길들이다 낙마하여 다리병신이 된 것 이 각각의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이 것이 정말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 없는 것이며, 불행은 행운을 잉태하거나 초래하며, 행운은 불행을 잉태하거나 초래하므로 하나하나의 단편적 사실에 대하여 좋다, 안좋다고 판단하여 너무 기뻐하거나 슬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는 장님이 코끼리의 일부를 만져보고 코끼리의 모습을 잘못 추측하는 것과 마차가지이다. 코부분을 만져본 장님과 귀부분을 만져본 장님이 코끼리의 모습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서로 주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새옹지마 사자성어의 노인은 모든 현상이 입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한정된 경험에 의하여 형성된 세속적 관점의 프레임을 통하여 보는 측면은 단편적이고 찰나적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배워야 할 지혜는 바로 이것이다. 모든 현상과 사건은 그 실체적 모습이 입체적이므로 자신의 프레임에서 보이는 측면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진리를 늘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또한 불교의 공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어떠한 대상이 보여주는 현상은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다양한 변수들과 시간적 공간적 조건의 결합을 통하여 그 의미가 계속 변할 수 있는 것이므로 어떠한 현상에 너무 집착하여 기뻐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의 동요없이 나에게 보여지는 다양한 현상들의 비실체성을 이해한다면 인간이 타고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출처] 새옹지마의 철학적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