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 합의체 가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를 포함한 민 청학련 관련 피곤인 38명에게 판결을 내리고 있다. |
이들은 소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의 배후 세력이란 이유로 1974년 체포되어 동년 6월 15일 비상군법회의 1심 재판을 거쳐, 1974년 9월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상고 기각 판결을 내린 지 만 19시간 만인 이날 새벽 집행됐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 법학자 회의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으로 의혹받는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사건은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북한 노동당의 강령을 토대로 한 대규모 지하조직을 구성, 활동한 혐의로 인혁당계 41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함으로 전모가 드러난 인혁당 사건은, 이 사건을 중앙정보부로부터 넘겨받은 공안부 검사들마저 피의자들의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하는 항명 파동을 일으킬 정도로 사건 자체가 조작 혐의가 짙었다.
재판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임이 밝혀져 관련자 대부분이 무죄를 선고 받고 일단락되었던 이 사건의 망령이 10년 후 다시 살아나 젊은 운동가들이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결국 이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