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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영웅을 기리는 청명절(4월 4일) 을 맞아 천안문 광장에 놓인 수천개의 주은래 추모 화환들. |
그러나 5일 새벽 1시,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강청 등 '4인방'의 지시로 천안문 광장에 놓여있던 수천개의 화환들이 모두 철거되고 현장에서 화환을 지키고 있던 57명이 체포됐다. 이른 아침, 밤새 일어난 일에 분노한 수만명의 청년과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그동안 주은래를 기리며 '4인방'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그들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였던 사람들이었다. 흥분한 이들은 민병과 경찰 지휘부에 쳐들어가 건물과 인근에 있는 자동차를 방화하는 등 십수시간에 걸쳐 천안문 광장을 점거했다.
이에 대해 당국은 수백명의 비무장병을 동원, 북경의 각 정부기관 경계에 들어갔다. 밤 9시 반이 되자 광장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가 다시 켜지는 것을 신호로 대기하고 있던 민병 1만명과 공안 경찰 3천명, 인민해방군 부대가 곤봉과 혁대를 손에 쥐고 일제히 출동했다. 광장에 남아 있던 군중은 포위되었고, 포위망은 점점 압축되었다. 마구 얻어맞은 군중은 차례차례 쓰러져, 잠시 후 상황이 종료됐을 때 광장 돌바닥 위에는 엄청난 양의 피가 낭자했다. 이것이 중국 전역과 전 세계에 큰 충격을 던져준 '천안문 사태'였다.
이날 몇 명이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베이징에서만 388명, 전국 각지에서 1,000명 이상이 체포된 것으로만 전해졌다. 훗날 사람들은 1989년의 '천안문 사태'와 구별하기 위해 이날의 비극을 '제1차 천안문 사태'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