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보랏빛 향기 달빛에 젖으면
묵은 가지 위 봉황이 앉아
외로운 밤 거문고 향연을 펼친다
별빛은 바람에 흔들리고
구름 따라 은하수 건너면
내 고향 금산에는
벽오동 나무에서 가야금 소리가 들린다
사랑은 봄바람에
진달래 꽃빛 가득 머금고
개천의 물소리 따라 독경 소리 울린다
사는 게 힘들 때마다
문득, 고개 돌리면
서쪽 하늘 노을 옷 걸쳐 입고
허 허 허 웃고 계신 당신의 얼굴
언어는 시의 길이다. 물은 강의 길이다. 산은 불의 미학이자, 바람의 무늬다. 상황에 따라, 주체나 객체에 따라 몸부림치는 지점이 시다. 시의 표정은 매순간 메시지로 드러나고 이미지로 확장된다. 시는 고향의 상징과 추억의 은유로 시인을 불러낸다. 시는 삶의 구체적 장소이자, 오감의 발원지이다. 시는 사물의 실존을 통해‘나’를 사유한다. 서정시는 언어 이전의 감정의 갈피이다. 시는 혼돈의 언어이자, 무형의 언어이다. 시는 언어를 빌어 몸이 된다. 저 다양한 땅의 말을 불변의 언어 속에 가둔다. 밤하늘을 쳐다보면 시는 영원처럼 빛난다.
우선, 문성희 시집『가슴에 묻어둔 외침』(2021, 북랜드)은 몇 가지 중요한 시적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금산錦山」을 중심으로 펼쳐진 유년 기억의 복원은 다양한 무늬로 직조된다. 낙동강의 정서와 육친을 둘러싼 애틋한 그리움의 정서는 질박하다. 봄 벚꽃이 꽃비가 되어 내리는 금산재의 풍경은 애조를 띤다. 그 아름다운 추억의 길은 시인이 타향에서 외로울 때마다 찾는 고향길이다. 서산 끝자락에 매달린 초승달을 곱게 쳐다보던 곳도, 뻐꾹새 울음이 숲길을 돌아 나와 반겨주던 곳도 금산재이다. 고령군 대가야읍에 위치한 ‘비단같이 아름다운 산 금산錦山(310m)’은, 대가야시대에 수비병들이 망보던 곳이라 하여 망산望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 시대 봉수대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비가 오면 이 낮은 구릉의 산은 안개로 자욱하다. 산의 정상에서 보면, 서쪽으로 회천을 끼고 낙동강이 흐르고, 남쪽 금산재를 넘으면 시인이 즐겨 찾는 단풍이 고운 ‘산림녹화기념숲’이 나온다. 년 전에 여러 시인과 고령을 여행하다 이 고즈넉한 가을 숲속을 산책한 적이 있다. 노을 무렵 만난 권영세, 문무학, 이하석 시인의 시와 시비는, 참으로 아름다운 인상으로 남아 있다.
시「금산錦山」은 지산동 고분군과 더불어 시인의 미학에 수많은 시적 모티브가 된다.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부드러운 산세와 선현을 모신 그 산은, 문성희 시 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점이다. 금산은 시인에게 있어, 가을 햇살에 머리 풀고 하늘에 감는 ‘억새’와의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보랏빛 오동꽃이 “달빛에 젖으면” “가야금 소리”를 듣던 곳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서정시의 보고寶庫이자 그리움의 공간이다. 봄바람에 “진달래 꽃빛”이 분홍에 실려 오면, 금산 계곡 “물소리”는 독경 소리를 낸다. 그렇겠다. 그에게 금산은 타향살이를 하다 문득, “사는 게 힘들 때마다” 그쪽을 바라보게 하는 위안의 산이다. 마치, 고향 집 아버지의 너른 가슴처럼 좋기만 하던 산이다. 이렇듯 서정시는 기억과 추억의 두 축을 이어주는 무지개이다. 서경과 서정을 버무려 자신만의 정서를 키우기도 하고, 새로운 이미지와 미의식을 투영하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문성희의「금산錦山」은, 고향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울림을 충직하게 재발견한 시의 샘물터이다. 그다음으로 살펴볼 시적 주제는 기행 시편이다.「대견사」는 비슬산과 더불어 시인이 즐겨 찾는 명사찰이다. 안개 가득 “참꽃 법문”이 번지는 황홀한 풍경이다. 팔각정 산 능선에서 바라본 비슬산 대견봉은 “한 폭의 수묵화”로 형상화된다. 낙동강 너머 노을이 고운「사문진 나루터」, 연분홍 코스모스를 뒤섞어 빚어낸「하중도」, 금강 상류를 그린「적벽강」은, 한국인의 원형 정서를 그리움의 색채로 그려낸 풍경화이다.
문성희 시집『가슴에 묻어둔 외침』에서 가장 뛰어난 장은 ‘요양원의 노래’ 연작 시편이다. 요양원을 운영하면서 체험한 시인의 ‘응시와 관찰’은 서늘하다. ‘늙음과 외로움’, ‘자식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 ‘기억과 치매’로 상정된 독특한 시적 상황은, 시인의 작품 세계를 철학의 높이로 끌어올렸다. 이 시편들은 독거노인들의 마지막 행장이자, 현대 사회의 비극적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텅 빈 방 안 고독하게 죽어가는 옆 침대의 말동무는, 인간의 절박한 실존을 목격케 한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죽을 것인가’하는 문제를, 불현듯 되묻게 한다. 망부가亡父歌 연작시 역시 이번 시집의 독창적 시선을 확보하고 있다. ‘선친’에 대한 애절한 호명은, 시인에게 ‘부재不在’의 아픔을 사무치게 한다. 봄 햇살을 맞으며 생의 한가운데 서서 아비를 부르는 절규는, 슬프고도 아프다. 기쁠 때나 외로울 때나 늘 시인에게 언덕이 되어준 아버지의 존재는, 떠난 후 가장 큰 빈자리로 남는다. 그 밖에도 역사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백두산 1」은, 시적 폐활량이 광활하다. 천지를 통해 배달 민족의 기상을 활달하게 뽑아내고 있다. 특히「비룡폭포1」은 천길 아래로 떨어지는 두 갈래 물줄기를 “하늘길”로 형상화한 점은, 호쾌하다. 쌍용雙龍이 승천하는 울음소리를 토해내는 비룡폭포를 보며, 우리 겨레의 흰 모시를 상상하는 시적 이미지는 신선하다. 이렇듯, 그의 시 세계는 피상적인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을 투영한다. 자신이 직접 체감한 날 것의 언어야말로, 문성희만의 독창적 세계로 규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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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시인 |
1962년 경북 영덕 구계항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1994년『문학세계』로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2020년『문장21』에 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구멍』,『처녀와 바다』,『깍지』, 시선집『고흐의 시』,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 평론집『시에 미치다』,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태양 셰프』출간하였으며, 시평론 대담집『저녁의 詩』를 편저했다. 대구예술상(2015), 고운 최치원문학상 대상(2018), 대구문학상(2018), 영남문학상(2020)을 수상했다. 대구시인협회부회장 역임, 대구문인협회 이사, 한국시인협회원, 대구아동문학회원,『텃밭시인학교』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