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세상에서 겨우
백 일을 살다가 갔지요
세상 더 먹은 나는 살아남아
철딱서니 없이 이 골목 저 골목 쏘다녔지요
어미는 꽃 피는 봄날,
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지요
우리 어머니
손놀림, 그렇게도 빨랐다더니
좋은 솜씨 칭찬도 자자했다더니
흰 명주 옷 입고
하느적 하느적 나비되어 날아가 버렸지요
병원 침대에 누워서
눈에 밟히는 어린 새끼들 남기고
그 새벽 어둠에 말려 가버렸지요
김청수의 4시집 『무화과나무가 있는 여관』(2014, 시와 사람)과 5시집 『바람과 달과 고분들』(2019, 시와 사람)은 크게 고향과 어머니의 죽음, 가난한 삶과 상처, 대가야 고분군과 불교적 사유, 낙동 정서와 샤머니즘이 중심 주제로 읽힌다. 사람에게 누구나 고향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자, 부모 형제와 동무들을 첫 대면한 곳이다. 살면서 느낀 마음 속 깊이 각인된 그립고 정든 터전이며, 천지만물의 온갖 이름과 자연 현상이 처음 몸에 밴 출발지이다. 옛사람은 집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가향家鄕 또는 향리鄕里를 썼다. 타향에서 부모를 여의었거나 유랑생활에 병고라도 만나면, 왠지 고향 산천만 떠올려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여우도 죽을 때는 제 머리를 고향으로 누인다고 했다. 고향을 떠나면 출향出鄕이요, 돌아가면 귀향歸鄕이다. 타의에 의하여 잃으면 실향失鄕이요, 객지를 떠돌다 도로 내려가면 낙향落鄕이다. 예나 지금이나 떠도는 자의 삶은, 모두 고달픈 타향살이다.
김청수에게 고향과 어머니는 정서적으로 가장 편안한 피신처로 인식된다. 그것은 고향이 모성의 품안과 동일시되는 심리적 현상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예술가와 문학가, 특히 시인들은 ‘고향 ․ 어머니 ․ 바다 ․ 집 ․ 길 ․ 자궁 ․ 우주’ 등을 작품으로 형상화할 때, 상당 부분에서 유사 이미지가 중첩됨을 목격한다. 고향과 어머니는 무의식을 체험하는 기억 공간이자 의식을 자각하는 발화점이다. 어머니가 안과 밖의 길이 배태된 곳이라면, 고향은 이승과 저승의 재생과 부활로 가는 ‘씻김’의 성소聖所이다.
김청수 역시 예외일리 없다. 그에게 있어 고향과 어머니는 동일 이미지로 섞이며, 가난은 이 둘을 잇는 기억의 촉발지이자, 상처와 위안을 한 축에 꿴 역설 공간이다. 만약, 김청수의 내면 상처의 풍경을 가장 잘 드러낸 한 편의 시를 선택하라면, 나는 「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지요」를 규정한다. 겨우 “백일” 밖에 살지 못한 어린 동생의 죽음도 아프거니와, 죽은 어미를 그리워하며 어린날 시인이 살아남기 위해, 이 골목 저 골목 떠도는 모습은, 외롭고 슬픈 아이의 실존 그 자체다. 시는 언어 속에 핀 한 떨기 슬픈 꽃이다. 시어의 행간은 그 시인이 살아온 삶의 총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다.
김청수는 잃어버린 기억 공간 속에서 어머니의 안팎의 다양한 생의 무늬를 잘라 재구성한다. 나는 왠지 2연 시구가 곱고 서럽다. “어미는 꽃 피는 봄날, / 꽃 따러 갔다가 / 꽃 따라 가버렸지요” 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다는 그 삶과 죽음 사이의 끝나지 않은 연속성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케 한다. 어린 새끼를 두고 죽어간 어미의 눈빛을 생각하면, 순간 먹빛이다. 김청수 시를 관통하는 시적 트라우마는 일찍 죽은 어머니에 대한 끝없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으로 요약된다. 그는 이런 아픈 상처에 대한 기억 재생을 통해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그 새벽 어둠에 말려” 가버린 어미의 마지막 숨결을 통해 시인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감동의 여운을 카타르시스로 끌어올린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