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산가족이 1946년 3월 15일 분단 후 처음으로 서신을 교환했다. 이날 남한에서 보낸 서신은 30만2천2백9통이었고, 북한에서 온 서신은 1만5천7백60통이었다. 남북 사시에 서신왕래가 끊긴 것은 한반도가 38선으로 분단된지 22일만인 1945년 9월 6일이었다.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령 군정은 해주우체국에 지시, 전신과 우편물 등을 남한에 보내지 못하게 하고 남한과의 전화통화도 차단했다. 이날 남쪽에서 보낸 서신은 친인척의 안부를 묻는 사적인 내용이 대부분인데 반해 북에서 온 서신의 상당수는 남한에서의 공산혁명을 부추기는 선전물이 주종을 이뤘다. 당시 남측에서 미 군정 소속 장교 1명과 사명 2명, 우체국 직원 3명 등 모두 6명, 북측은 소련 장교 1명, 평양우체국 직원 5명 등 6명이 각각 우편물 수송을 담당했다.
이들은 기동차에 우편물을 싣고 개성역에서 만나 우편물을 교환했다. 이후 우편물 교환장소는 소련측의 요청에 따라 38도선에서 북쪽으로 1백여m 떨어진 여현역으로 바뀌었다. 북측은 6.25 이틀전에 서신교환을 일방적으로 중단함으로써 이산가족들은 2001년 3월 15일 이산가족 서신교환이 이뤄질 때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생사를 모른 채 살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