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렁 하나 사이 밭에
한 알 한 알 심어 잘 자라준
강냉이 꺾어 와 옷 벗겼다
아이고
이 일 우짜마 좋노
내가 심은 강냉이 보라색인데
노오란 강냉이가 우얀 일이고
분통 터져 와드득 와드득 뜯다가
혼자 씨익 웃었다
숫바람 서방 놈이 꽃가루 묻혀
바람난 강냉이 치마 속에
저질러 놓은 흔적
보라색 노오란색 알록달록 강냉이
옷 벗겨 찜통에 찜질시켜
나랑 텃밭학교 나들이 갔다
동인들 강냉이 하나씩 들고 하모니카 불고
야한 농담 웃음보 터지게 한
참 즐거운 바람난 강냉이
얼마 전 출간된 황손순 시집 『바람난 강냉이』(그루, 2020년)는 토속적 풍경시의 전범으로 읽힌다. 팔공산 둘레를 끼고 그녀가 사는 집은 들녘 한 복판에 있다. 이따금 누런 벼들이 익어가는 들판을 가로질러 칙칙푹푹 칙칙푹푹 기차가 달리는 풍경은, 고운 한 줄의 서정시 같다. 팔공산을 배경으로, 그녀는 어쩌다 홀짝홀짝 한 잔 막걸리에 취하면, 방 안 가요방 마이크를 켜고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곤 한다. 안주는 풋고추랑 산 둘레에 흐르는 구름을 버무려, 하늘로 먼저 가신 부모님과 남편을 모셔와 지짐이를 부쳐 먹는다. 그저 외로워 혼자 달빛 한 그릇을 먹은 죄 밖에 없다는데, 언젠가부터 그녀의 가슴 속에는 ‘시’란 것이 들어와 산다. 채진 밭에서 옥수수를 딸 때에도, 밭두렁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볼 때에도, 가슴이 벌렁벌렁하다는 것이, 수상한 시골 아지매가 다 되었다. 이른 아침 까치가 그녀의 원고지에 들어오면, 이내 다음 행은 참새가 물고 가고, 시냇가 물방개랑 피라미 놈도 서로 끼워달라고 행간에 꼬리를 친다고 한다.
그녀와 만난 지도 벌써 육칠년이 되어가나 보다. 목요일 그녀가 음식을 차려 시 공부하러 오는 날은 온통 떠들썩한 시골 잔칫날 같다. 아침부터 도토리묵에, 지짐에, 막걸리 한 잔들을 걸치면, 문우들의 얼굴은 불콰한 노을이 된다. 처음 시 공부를 하려고 찾아온 날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다. 봄 진달래에 미쳐 들로 산으로 천지사방 쏘다니다 온 가무잡잡한 산골 아낙네 같았다. 소녀 때부터 시인이 꿈이었다고 하던 그녀는, 참으로 순박하게 보였다. 훗날 시집이 나오면 제일 먼저 팔공산 수태골에 사는 그녀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거라고 말했다. 더덕이랑 제비꽃이랑 구절초에게 그 기쁜 소식을 일등으로 전해야겠다고 웃었다. 그리고 밤마다 달빛에 나와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는 먼저 간 남편과 사랑스런 자식들에게도 행복한 소식을 알려야겠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그녀의 시집을 들춰보면, 논두렁이 시가 되고 목화 꽃이 시제가 되고, 여름 밤 개구리 소리가 그녀의 마을 주민이라는 것을 알겠다. 이제 새벽녘까지 밤바람 속에 헤매다, 그 옛날 그녀가 살던 빈집에 들어가도, 자신이 지은 시집이 있어 외롭지 않겠다.
황손순 시집 『바람난 강냉이』 속의 표제시 「바람난 강냉이」는 해학의 극치이다. 그녀는 농사를 짓다가도 이웃 농사꾼들에게 웃기는 말로 이고랑 저고랑 다니며 들었다 놓았다한다. 웃음을 왜곡하거나 비꼬는 것이 아니라, 시골 어디에서나 흔히 듣는 사투리로 배꼽을 쥐게 한다. 우스꽝스런 풍경을 자신에게 맞게 잘도 버무린다. 어쩌다 한번 웃음이 터지면 멈출 줄 모르는 그녀는, 시 속에서도 소시민들의 성문화를 대범하게 까발린다. 「바람난 강냉이」는 첫 연부터 강냉이 옷을 벗기는 의인화가 볼만하다. “아이고 / 이 일 우짜마 좋노 / 내가 심은 강냉이 보라색인데 / 노오란 강냉이가 우얀 일이고”, 그렇다. 이 시는 보라색 강냉이가 옆 고랑 노란 강냉이와 눈이 맞아, 노란색과 보라색 반반씩 혼혈아가 되어 나온 비유적 해학이 기가 막힌다. 만물양아(萬物養我)라 했던가. 황손순의 시를 키우는 시상은 지천에 널려 있는 듯하다. 그녀에게 시란, 옥수숫대 너머로 보이는 모든 것이 행간이요 뒷산과 숲 속에 들리는 온갖 소리가 시어이다. 밭고랑 지나 훤한 팔공산 구름도 시요 불그레한 노을도 시이다. 어떤 저녁은 산새 소리 바람 소리를 숟가락으로 떠먹기도 하고, 채진 밭에 자라는 채소들에게 귀엣 말로 시를 읊조려주기도 한다. 하여, 그녀의 시는 물아일체를 지향하며, 천지만물이 모두 그녀의 시 밭 속에서 희한하게도 한 가족이 된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출간
2002년 제 2시집 『구멍』 출간
2004년 제 3시집 『처녀와 바다』 출간
2007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출간
2014년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 『깍지』 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 『태양 셰프』 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 『저녁의 詩』 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2020년 시선집 『고흐의 시』 출간
계간지 『문장21』 봄호 평론 당선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