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3월 4일, 일제 통감부가 현행 호적법의 효시가 되는 '민적법(民籍法)'을 제정ㆍ공포했다. 민적법은 이후 4월 1일부터 시행됐다. 개인의 신분관계를 법률상으로 명확히 하고 전국의 호수를 정확히 파악하는게 목적이었다지만 조선을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일제의 은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조선의 호적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당시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1896년 갑오경장 입법의 일환으로 호구조사규칙(1896년 9월 1일)과 호구조사세칙(1896년 9월 3일)이 공포되면서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호를 구성하는 기준이 호주와의 혈연관계가 아닌 동거 여부에 따라 결정됐기 때문에 호주의 직계존속 및 직계비속이라도 동거하지 않으면 호적을 달리해야했다. 민적법은 호구조사규칙과 달리 가(家)와 가에 속한 개인의 신분관계를 증명하는 신분등록제도였다.
민적법에 의거, 통감부가 1909년에 조사한 '민적 통계표'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1300만명. 경북이 153만명(11.5%)로 가장 많았고 전남이 150만명, 경남과 경기는 각각 136만명과 110만명이었다. 서울은 23만명(1.8%). 성비는 남자 100명당 여자가 88.4명으로 극심한 남아선호사상을 드러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계급은 타파됐지만 성(姓)과 본(本)은 여전히 양반이나 양민들의 전유물이었다. 민적법은 거의 절반에 가까운 하층민들에게 새로운 성과 본을 부여, 새 삶을 살도록 했다. 전국민이 성을 갖도록 한 민적법 시행 이후 파악된 당시 한국인의 성은 약 250여개 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