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초록 세금 계산서를 본다
봄바람 햇살 대차대조표
연둣빛 잎 새 수입을 올린다
뜨거운 여름 뼈를 깎는 지출
강한 세풍稅風이겨낸다
가을은 탈루의 기미가 보이고,
단풍은 빨간 세금 계산서를 흔들고
열매는 영글어 가는 소득의 씨방
겨울나무는 빈 잔고 추위를 견디며
이듬해 폭설을 뚫고 올라오는 순이익 위해
또 다른 연둣빛 세금계산서를 만든다
이번에 출간된 이전호 시집『단풍 세금』(2020, 그루)이 주목받는 이유는, 직관에 의해 포착된 기발한 착상의 시적 상상력의 힘 때문이다. ‘실재’와 ‘표상’이란 전혀 다른 세계를 개연성의 세계로 메워주는 역할을 바로 ‘상상력’이 하기 때문이다. 질베르 뒤랑은 상상력이란 “세상과 사물을 맺어주는 비밀스러운 끈”이라고 말했다.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은 ‘상상력과 기발한 시선視線’을 확보한 작품들로 특이성을 띤다.
시집의 표제시「단풍세금」은 놀라운 은유적 발상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시인의 말을 빌리면, 천지天地 만물은 모두 생사生死의 납세자이다. 하여, 하늘과 땅은 음양과 오행의 법칙으로, 사물의 사계절 별로 조세 평등을 실시한다. 강물 한 종지라도, 바람 한 점이라도 세금을 포탈하거나 누락하는 법이 없다. 노자의 도덕경 임위편에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실疏而不失’이란 말이 그 숨은 뜻이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 엉성해 보이지만, 결코 그 그물을 빠져 나가지는 못한다.’ 하여, 지구는 우주의 국세청이다. 보이는 세금과 보이지 않는 세금을 관리 감독할 뿐 아니라, 경제 사범은 엄중하게 다스리며, 탈루를 막고 직접세를 매긴다. 천지는 사물의 형상을 창조하여 순이익을 남기기도 하고, 파괴하여 손실을 무화無化시키기도 한다. 봄은 색채로 자신의 값을 한껏 올린다. 연두 빛으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온갖 다채로운 꽃을 피워 판매한다. 색色끼야말로 천지간의 욕망의 제무제표이다. 여름 초록은 사세社勢를 최고조로 확장한다. 때론, 태풍과 번개에 나무가 부러지기도 하지만, 약삭빠른 놈은 실패를 기회로 삼아 승승장구하기도 한다. 구름은 물의 악기를 통해 음을 배달하여 먹고 산다. 상징의 선율로 그려낸 이미지를, 구상과 추상으로 바꾸어 세금을 낸다.
가을 단풍은 속아도 즐거운 사기꾼이다. 아니, 천지를 물들이는 천염염색 장사꾼이다. 시공을 통해 사물의 몸을 색의 시각화로 승화시킨다. 하여, 겨울은 한철 장사로 떼돈을 모아, 그 밑천으로 봄까지 견딘다. 서정시는 알고 보면, 천지간 사물의 중심을 잡아주는 차변借邊과 대변貸邊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지만물을 지극(至極) 정성으로 모시면 명작이 탄생하고, 거들먹거리는 순간, 졸작의 손실이 발생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지구의 백화점에는 색色의 상품과 공空의 상품이 다채롭게 진열되어 있다. 그래서 시란 놈은, 지수화풍토地水火風土란 경이로운 재료를 버무려 최고의 이익을 얻는 천하 도적盜賊인가 보다. 하여, 그 도적놈을 일컬어 세상 사람들은, 해와 달의 법칙을 빌려와 거래하는 큰 사업가라 부르기도 하고, ‘태극의 조화를 팔아먹은 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않는 ‘대도大道 같은 놈’이라고도 추켜세워 주기도 한다.
시「단풍 세금」은 이번 시집의 표제 시이자 이전호의 대표작이다.「단풍 세금」의 놀라운 점은‘단풍’과 ‘세금’이란 이질적 언어를 은유와 놀라운 상상력을 통해,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결합시킨 점이다. 이런 기발한 시선視線’은, 그가 얼마나 일상성에서 낯선 이미지를 읽어내려고 노력하였는지를 여실히 증명 한다. 이런 직업어에 대한 시적 ‘응시’와 ‘사유’는 그의 서정 시편 전반을 이루고 있는 탁월한 성과이자,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의 개척이기도 하다.
초록을 지나온 ‘단풍’을 ‘세금’으로 본 기발한 시각적 심상은, 세무사의 화법이자 직업어를 시의 언어로 바꾸어 낸 낯선 시의 전형이다. 일상을 뒤집어 본 발상이자, 기존 서정 시법을 따르면서도, 시어의 신선도가 펄쩍거린다. 이런 생기의 시어는 읽는 이로 하여금 놀라운 정서와 느낌을 다채롭게 갖게 한다.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세금 계산서’를 떠올린 시인이, 대체 몇 이나 될까. ‘봄 햇살’을 대차대조표로, ‘연둣빛 잎 새’를 수입으로 잡다니, 참으로 발칙하다 못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여름의 폭염을 ‘뼈를 깎는 지출’로 본 섬세한 관찰도 시어의 맛을 한껏 돋운다. 가을 열매와 낙엽의 떨어짐을 ‘탈루脫漏’로 인식한 점 또한, 어느 시에서도 볼 수 없는 오묘를 얻었다. 아마「단풍 세금」을 읽은 독자들은, 가을 단풍이 ‘빨간 세금 계산서를 흔들고’ 있는 모습으로 착각하리라. 그리고 겨울나무들이 ‘빈 잔고 추위를 견디며 // 이듬해 폭설을 뚫고 올라오는 순이익 위해 / 또 다른 연둣빛 세금계산서’를 만드는 과정을 즐겁게 지켜보리라.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출간
2002년 제 2시집 『구멍』 출간
2004년 제 3시집 『처녀와 바다』 출간
2007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출간
2014년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 『깍지』 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 『태양 셰프』 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 『저녁의 詩』 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2020년 시선집 『고흐의 시』 출간
계간지 『문장21』 봄호 평론 당선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