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신병동에 프리다 칼로가 헨리포드 병원의 침대 하나를 옮겨 온다. 침대에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누워 있다. 나의 병실로 들어서자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서 탯줄이 흘러나온다. 내 배꼽이 사라지고 나는 그 탯줄에 매달려 그녀의 배 위로 떠오른다. 그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내가 허공에서 가부좌를 하고 두 눈을 감는다. 3, 내 몸은 건강하다((세 번 반복한다)). 2, 내 마음은 편안하다((세 번 반복한다)). 1, 몰입 상태로 들어간다((세 번 반복한다)). 나는 지금 엘리베이터 안에 있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간다. 10, 9, 8, ((더 깊이)), 7, 6, 5, ((더 깊이, 더 깊이)), 4, 3, 2, 1,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자궁이다.
자궁 안에서 詩를 쓴다. 그녀의 뼈가 한 줄 한 줄 약해진다. 詩가 되지 못해 몸부림친다. 그녀의 진통이 심해진다. 미칠 것 같아 그녀의 배를 찢고 뛰쳐나간다. 탯줄을 끊고 달아난다. 그녀의 내장이 몸 밖으로 흘러내린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계속 피를 흘리고 있다. 담당 간호사가 급히 내 뒤를 쫓는다. ((이봐요, 보호자님, 보호자님)), 보호자님이 내 뒤를 쫓는다. ((이봐요, 보호자님, 보호자님))이 내 뒤로 점점 멀어진다. 나는 문이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간신히 탄다.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올라간다. 1, 2, 3,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면 다시 10층이다. 10층은 옥상이다.
나의 정신병동의 보호사들이 옥상 철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 두드림에 옥상도 울렁대고 바닥도 울렁댄다. 그녀가 없으면 커져 버리는 내가 옥상 바닥 끝에서 가부좌를 한다. 하늘도 어수선하고 땅도 어수선하다. 두 눈을 감는다. 점점 작아진다. 허공으로 몸이 떠오른다. 머리가 무거워 머리가 먼저 내려간다. 엘리베이터도 따라 내려간다. 10, 9, 8, 7, 6, ((더 깊이, 더 깊이)), 5, 4, 3, 2, 1, ((꽝))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면 포토샵이다.
그녀의 포토샵 窓에는 프리다 칼로의 도로시 해일의 자살(1939)이 걸려 있다. 다른 窓을 열고 두 명의 내가 들어온다. 그녀는 도로시 해일의 자리와 자세를 나에게 내어 준다. 두 명의 나는 그녀의 안내대로 그 자리로 가서 그 자세를 취한다. 그녀가 두 명의 나를 미친 사람 보듯 한다. 그리고「어느 정신병자의 꿈(2010)」으로 저장한다. 그녀가 포토샵 窓들을 모두 닫는다. 그녀가 문을 열고 작업실을 빠져나간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 또 다른 나에게 말을 한다. 그렇게 해서 옥상까지 오를 수 있겠어? 물론이지! 하며 또 다른 내가 허공으로 솟구친다. 머리가 무거워 발부터 올라간다. 엘리베이터도 따라 올라간다. 1, 2, 3,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면 병실이다.
나의 병실에는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두 명의 내가 그려진 그림 하나를 걸고 있다.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가령 시인이 달을 일러 “달아 나다. 너를 키워낸 엄마다.”(「달아나다」,『벌레11호』, 문예중앙, 2011)라고 말할 때, 그것은 명명이 도주되는 시, 명사(실체)와 동사(운동)가 서로의 자리를 바꾸는 시에 대한 선언이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이 젊은 시인의 가능성이 미처 다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조금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그의 첫 시집은 2011년에 나왔으며, 그때는 그의 때 이른 통찰이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는 너무 일찍 도착했으되, 그의 시집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 그는 시대를 뒤늦게 예언한 선지자였던 셈이다. 다행히 두 번째 시집은 그리 늦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자신의 속도에 세계를 맞추게 되었다.”(권혁웅, 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2016, 민음사) 작품 해설 중에서)
5년 만에 여정이 들고 나온 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2016, 민음사)를 이상(李箱)이 읽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사건이다. 이번 시집은〈고통에 찬 육체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 육체와 정신의 불협화음〉이자,〈텍스트가 너무 쉽게, 빠르게 전해지는 이 시대의 경계에서 느끼는 혼란과 불안, 그 속에서 찾아온 자아의 분열〉등을 담은 시집으로 정의된다. 내가 여정의 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2016, 민음사)를 받아 들고, 시 행간 속에 숨어있는 여러 겹의 화자를 하나씩 벗겨내고 있는 동안, 봄 개나리가 신천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개나리의 노랑을 벗겨내고, 냇물에 비친 양털구름을 벗겨 내고, 그 물 따라 흘러가는 초록을 벗겨내는 동안, 또 한 번 나는 그의 자서란 감옥 속에 갇혀 나를 여러 겹 벗겨 내어야만했다.
〈달과달사이·한번쯤은마음을나누는사람이고싶었다…달과달사이·거울이왔다·깨졌다…달과달과…달사이·거울들어왔다·깨졌다·깨졌다…깼다·꿈으로돌아갈·꿈이될·시간이다…달과달과달과…달사이·나는·우리는·또변할수있다〉
새벽에 일어나 수십 번 단어와 문단 사이, 말줄임표와 가운뎃점 속에 숨겨 둔, 여정의 시어의 뼈와 살을, 내 심장의 피에 적셔 발라 먹었다. 그리하여 나도〈달과달사이·한번쯤은마음을나누는사람이고싶었다〉달과 달이 서로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따스한 언어의 불을 쬐며, 깨진 거울 속을 밤낮으로 오갔다. 그의 말처럼 언어〈그 너머〉란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여, 언어는 태초부터 절벽 이전과 절벽 이후였는지도 모른다.〈언어 그 자체가 물질이다〉는 그의 말에 기립박수를 치다가, 문득 나는, 여정의 자서를 부채에 시니컬한 고딕 캘리체로 붓으로 썼다. 그를 만나면 전해 주리라 생각하다가,〈…달과달사이·거울이왔다·깨졌다…달과달과…달사이·거울들어왔다·깨졌다·깨졌다〉그리고 나는 꿈을〈…깼다·꿈으로돌아갈·꿈이될·시간이다…달과달과달과…달사이·나는·우리는·또변할수있다〉그에게 전해줄 부채가 내 서재 한 켠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것처럼, 현실과 꿈의 간극은 빙벽만큼이나 춥다. 그래서 천지만물은 변한다, 아니 변할 것이다. 하여, 봄도, 우리도, 언어의 행간 속에서「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가 될 수 있다.
우선,「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를 오독하기 위해서는, 독자는 멕시코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의 절규를 들어야 한다. 칼로의 그림『나의 탄생』(1932, 금속판에 유채, 30,5×35,0cm, 개인소장) 앞에 서면 참혹하다. 핏물이 배인 침대위에서 흰 천을 덮어쓴 여자의 자궁 밖으로 내민 물컹거린 아기 머리가 보인다. 신식민주의적인 모더니즘에 대항한 이 리얼리티는, 남성 문화에 갇힌 칼로의 고뇌를 대변한다. 일곱 살에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된 칼로는, 열아홉 살에 전차 사고를 당해 평생 동안 서른두 번의 수술 끝에,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 화가로의 삶은 잔인했지만, 고통의 피를 찍어 그린 예술은 찬란했다. 1984년 멕시코 정부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국보로 분류한다.
그림「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속에는, 정신병자인 ‘나’를 위해 병실 벽에 프리다 칼로가 헨리포드 병원의 침대 하나를 옮겨 오는 것이 보인다. 침대에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누워있다.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선 핏물이 흘러나오고, 나는 탯줄에 매달려 버둥거린다. 시의 산고(産苦)를 은유하기 위해, 주체인 ‘나’를 자궁 밖에 고개를 내민 참혹한 타자(他者) 아기와 수정시킨다. 오독을 용서한다면, ‘정신병동’이란 가상공간은 더할 나위 없는, 매력적인 시의 가면이다. “내가 허공에서 가부좌를 하고 두 눈을 감는” 까닭은, 시의 자궁에 도달하기 위한 노정이다. 자궁의 상징은 “詩가 되지 못해 몸부림”치는 장소이자, “그녀의 배를 찢고” 뛰쳐나가는 시적 발광의 성소(聖所)이다. 하여,「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속에 여럿 ‘나’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는, 예술의 본질이 고해(苦海)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포샵 窓에 프리다 칼로의 그림「도로시 해일의 자살」(1939)을 걸어 놓아도 무방하다. 이런 추상 언어의 붓질과 색감, 시 행간 사이의 비극과 음영은, 결국 ((더 깊이, 더 깊이)) 내려가는 선(禪) 호흡에서 잠깐, 모인다.
알고 보면, ‘나’, ‘그녀’, ‘칼로’, ‘도로시 해일’은 자궁을 통해 치유될 수밖에 없는 고통을 감싼 여성성이다. 결국, 여정의 시는〈세상에 없던 전면적인 언어 실험〉이며,〈물질의 구성요소를 쪼개어 원소를 구분하고 다시 원소끼리의 조합으로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는 과학자의 호기심 어린 연구〉처럼 재배치된다. 여정의 이런 언어 실험은, 언어를 형태소의 최소 단위로 쪼개고, 단어와 기호를 혼합하고, 색채와 시선을 분산하여, 수많은 점으로 찍어 놓은 그림 액자 속의 작은 ‘나’가 된다. ‘나’는 현실의 벽으로 인식된 띄어쓰기, 고정된 행간 속의 논리적 관념을 이중괄호로 무화시키며, ‘시선’를 다초점으로 분열시켜 독창적인 시의 색체가 된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출간
2002년 제 2시집 『구멍』 출간
2004년 제 3시집 『처녀와 바다』 출간
2007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출간
2014년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 『깍지』 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 『태양 셰프』 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 『저녁의 詩』 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