半 지하방에서 꿈틀댄다. 12시를 향해 기어가는 시침 위에서 꿈틀댄다. 꿈틀대자마자 결핵약을 먹는다. 10개의 환약들이 식도를 타고 꿈틀댄다. 나는 10개의 환약들에 끌려다닌다. 수정체를 뚫고 급습하는 벌레 1호, 실내화를 신은 발로 밟아 죽인다. 책상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 2호, 책상 위에 놓인『죽음의 한 硏究』를 번쩍 들어 쳐 죽인다. 벌레 3호는 볼펜심으로 콕 찍어 죽인다. 벌레의 주검 앞에 냉소를 던진다. 입안에서「헌화가(獻花歌)」가 꿈틀댄다. 철쭉꽃이 피어난다. 참꽃이 아닌 그 개꽃이 피어난다.
밥그릇에 담겨 꿈틀댄다. 밥알들이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댄다. 식탁 위를 달려가는 벌레 4호, 입안에 든 숟가락을 번개같이 빼내어 쳐 죽인다. 오물오물 씹히는 밥알들이 벌레 4호 같다. 콩나물이 꿈틀댄다. 파김치가 꿈틀댄다. 그 사이로 지나가는 벌레 5호, 젓가락으로 집어 들어 그 사이에 끼워 죽인다. 벽이 꿈틀댄다. 의자가 꿈틀댄다. 가만히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방바닥에 가만히 있던 벌레 6호, 드러눕는 등짝에 짓눌린다. 나도 몰래 죽인다. 살갗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 7호, 8호, 9호, 이리저리 뒤척이며 꾹, 꾹, 꾹, 눌러 죽인다. 천장이 꿈틀댄다. 몇 켤레 구두가 내 머리 위에서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댄다.
벌레 10호, 잠을 뚫고 들어와 꿈속을 기어 다닌다. 투명한 재떨이를 들어 가만히 얹어놓는다. 서서히 죽인다. 죽은 벌레 10호를 재떨이에 담아 한 번 더 태워 죽인다. 꿈속에서도 꿈틀댄다.
변신과 벌레
1시집『벌레11호』(2011, 문예중앙)는 등단 후 무려 13년 만에 나왔다. 그의 시편들을 한 문단 한 문단 읊조리면, 뼈를 깎은 시어의 탁마가 수정처럼 빛난다. 2002년『현대시』2월호에서「벌레 11호」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순간 카프카(체코 프라하 1883년~1924년)의 소설『변신』속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와「벌레 11호」속의 화자와 한 겹으로 보였다. 등단 전 시인의 암투병과 두 차례의 결핵은, 시어의 행간과 고뇌 속에 고통의 화인(火印)으로 고스란히 찍혀 있다. 이런 독한 알약과 병력은 카프카(그 역시 결핵이었다.)와 여정에게 끊임없는 불안장애와 콤플렉스, 환각과 환시를 안겨다 주었으리라.
『변신』을 숙독하면서,〈왜 그레고르 잠자가 하필이면 벌레로 변했을까?〉를 자문했다. 소시민의 출구 없는 절망적 삶을 카프카와 여정은 은유의 화법으로 치고 나온 것일까. 아무리〈변신〉을 하려고 발버둥쳐도, 아버지(가난, 직업, 사회, 국가, 세계)로 상징된 거대한 폭거의 그물에 걸려, 뛰쳐나갈 수 없음을 두 작가는 알고 있었을까. 결국 사과 한 알에 맞아 고독하게 죽는 카프카의 ‘벌레’나 끊임없이〈半지하방에서 꿈틀〉대며, ‘벌레’를 죽여야만 하는 ‘나’의 숙명은, 어쩌면 자신들의 환경에 묶여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현대인의 고뇌를, 인간 실존의 근원적 약점을 꿰뚫어 본 것은 아닐까. 하여, ‘벌레’는 자아를 잃은 현대인의 그로테스크한 자화상이자 불안한 실존의 표징으로 읽힌다.
이장욱은 표사에서 시집『벌레 11호』(2011, 문예중앙)의 의미를 이렇게 적었다.〈이것은 바코드 시대의 카프카일까? 모니터 킨트 이상(李箱)일까?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이름은 벌레 11호이다. ‘벌레’라는 카프카적 존재와 ‘11호’라는 이상식 기호의 음습한 합체, 그 언어는 순수하지도 않고 명징하지도 않다. 일반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없다. 악성코드들에 감염되고 오염됨으로써만 존재하는 시인의 언어.〉이다.〈이제 벌레 11호의 일은 이 불구의 세계를 온몸으로 기어가는 것 자체이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 나는 이제 이 긴 의태어들을, 이 아픈 문자들을,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읽으려고 한다. 그것이 벌레 11호를 만나는 가장 깊은 방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출간
2002년 제 2시집 『구멍』 출간
2004년 제 3시집 『처녀와 바다』 출간
2007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출간
2014년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 『깍지』 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 당선
2017년 동시집 『태양 셰프』 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 『저녁의 詩』 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