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해체주의는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에 의해 주창되었다. 텍스트와 의미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려는 하나의 접근 방법이다. 해체주의는 서구 형이상학의 해체작업이자 일종의 자기비판으로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전체성, 즉 신(神)이나 이성 등 질서의 기초에 있는 것을 비판하고, 사물과 언어, 존재와 표상(表象), 중심과 주변 따위 이원론을 부정하며 다원론(多元論)을 내세운다. 데리다의 사상은 결코 고립된 것이 아니며 롤랑 바르트와 미셸 푸코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서구사상에 대한 상대화의 시도를 계승한 것이다. 통일적인 것을 거부하여 리좀상의 것, 유목민적인 운동을 사상에서 구하는 질 들뢰즈 등의 사상과도 연동 된다. 중요한건 여기서 말하는 해체가 무조건 카오스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의 부작용인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에 반대하고, 그동안 이성에 밀려 무시되어 왔던 감성, 비주류, 여성, 아이, 유색인 등의 요소를 재조명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보자는 것이 해체주의의 본래 취지다. 이론화, 수식화에 치중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좀 다른 요소들도 고려해보고 종합적으로 두루 고려해 보란 이야기다. 해체라는 말에 혹해서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그럼, 한국현대시에서 해체시의 계보를 짚어보자. “소통이 막힌 시대의 낯선 “의사 소통의 한 형식”이던 해체, 그 자유정신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해체시의 제1세대인 이성복은『남해 금산』이후 연애 담론의 세계로, 황지우는『나는 너다』이후 긴 침묵과 방황 끝에 선적(禪的) 직관의 세계로 망명한다. 그 망명은 해체시의 종언을 전하는 신호일까.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다.
1990년대로 접어들며 싹튼 해체시 이후의 도시시와 인문주의에 바탕을 둔 신서정의 시는 해체시의 정신을 잇고 있다. 이런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시적 대응이 낳은 산물로 보인다. 1990년대 시인들의 세계가 보여주는 탈이념화, 탈중심화의 가속과 확산 그리고 새로운 낙관주의는 그들이 1980년대의 급박한 정치 또는 이념의 논리에 얽매여 있지 않다는 증거다. 그들은 1980년대의 시인들과 달리 타락한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이 세계가 정말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일까 하고 심각하게 묻지 않는다. 쓸데없는 원죄 의식에 사로잡혀 쩔쩔매지도 않는다. 그들은 깃털처럼 가볍게 현실―제도 그리고 이런 것의 숨은 원리로 작용하는 도덕과 이데올로기 위로 떠다닌다.
해체 1세대 시인들의 자아 속에 드리워 있던 정치적 무의식을 털어버리고 가뿐해진 이들 해체 이후의 신세대, 이를테면 송찬호 · 유하 · 김기택 · 진이정 · 장경린 · 이연주 등에게서 해체적 속성의 내면화를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시를 해체 운동의 퇴조와 직결시키거나 탈해체 경향의 새로운 징후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그들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해체 정신과의 단절이 아니라 해체 정신의 새로운 전개 양상이다. 그들은 해체 1세대의 과격한 양식 해체를 무반성 속에 답습하지 않고 해체 정신에 대한 끝없는 모반과 일탈을 통해 새롭게 갱신된 해체 양식으로 나아간다.
신서정과 도시시 계열에 드는 시들을 선보인 1990년대 시인들은 해체 1세대의 방법적 해체를 단순 계승하거나 해체시 이전의 전통 서정시 양식으로의 복귀를 꿈꾸지 않고 해체시 이후의 정신을 추구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저희가 해체시와 동궤의 세계관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한 핏줄’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해체시와 정신사적으로 단절―지속 또는 지속―단절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방법적 인식의 세계로 나아간다.”(장석주,「1980년대 한국문학사적 특징 - 해체시 시대 이후의 상황」)
박상순의 시 세계는 해체시와 무의미시의 경계 지점에 놓인다. 언어의 해체를 통해 이미지로 재구성한다. “그에게 시의 대상은 현실이 아니라 언어, 혹은 기호이다. 그는 현실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재현한 현실, 말하자면 기호의 세계를 노래하고, 다시 기호화하고, 그런 점에서 헛것, 환상, 2차 현실을 노래한다. 그가 대상으로 하는 것은 영화, 만화, 포르노, 회화, 상품 기호 등이다. 뿐만 아니라 기법의 측면에서도 그는 만화, 그림,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문자와 이미지의 경계 해체를 노린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그의 시는 이상의 시처럼 난해한 듯하면서도 결코 난해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듯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 서정적이면서도 그 누구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독창적이면서도 독보적인 문체를 구사하는 그다. 또한 박상순의 시는 변신한다. 시의 내부에서, 시의 외부에서, 시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얼굴을 바꾼다. 그 어떤 존재의 규정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한다. ‘박상순의 시는 이렇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그렇지 않은 다른 것’이 된다. 그래서 박상순은 “리좀적 존재”(오형엽)다.
시,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는 박상순의 세 번째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1994, 민음사)의 표제시다. 이승훈은 해설을 들어보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의미가 탈락된 상태에서 제멋대로 연결되는 무의식의 삶, 그것은 정신불열증적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시는 부르주아 문화를 지배하는 고상한 인문주의자들, 선험적 관념적 자아를 믿는 정신주의자들의 세계관을 미적으로 비판한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부정의 극한에 남는 것은 일종의 절망의 놀이이다. 시 속에서 열 개의 장난감이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나>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장난감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이라는 시행들이 암시한다.(…) 이 시는 이성적 사고니 의식이니 하는 것들이 사라지는 시대의 황폐한, 끔찍한, 그러나 해학적인 <나>의 초상이다.”
우선,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는 시행간의 의미를 독자가 굳이 몰라도 따라 읽으면 덩달아 즐겁다. 시행의 반복과 리듬이 주는 경쾌함 뿐 아니라, 숫자와 명사로 된 시어간의 생뚱맞은 은유의 ‘낯섬’은 이 수수께끼 같은 시 의미의 궁금증을 한껏 증폭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는 배우거나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다.”고 했다. 우주는 그 자체가 은유이다. 은유를 통해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우주의 비밀을 화자와 동일시한다.
정끝별은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속의 은유에 대해 “‘A는 B’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A와 B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6이 나무이고 7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A에 혹은 B에 마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6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무라고 씌어 있고, 7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1부터 10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정끝별,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권』 2008, 민음사)라며 자신의 궁금증을 의문형으로 끝맺었다.
앞의 해설을 읽고 보니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 기」라는 시가 마치, 어린 아이의 언어 유희적 상상력이 무의식적으로 이런 은유를 만든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러나 인간이야말로 무맹목적 충동과 욕망의 사슬로 칭칭 감긴 존재이다. 예술작품에서 개인과 세계에 대한 불만족과 갈등은 질량체인 몸을 통해 드러난다. 대게 경우 창작자는 이런 몸을 소재로 그 사회의 굴곡 된 단면을 예리하게 파헤쳐보고 싶은 미적 욕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혹자는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에서 “첫 번째는 나”라는 생뚱맞은 은유를, 현대인의 ‘욕망’과 화자 ‘나’를 동일시한 화법으로 본다. 즉, ‘나’야말로 욕망덩어리의 주체인 셈이다. 화자는 연이어 “2는 자동차”라고 단정적 은유를 썼다. 이런 은유적 시작태도를 통해 현대인의 욕망의 기표를 ‘자동차’로 규정하고 싶었기 때문이겠다. 자동차는 개인 간의 부의 가치 척도이자, 생과 사를 함의하는 현대사회의 비틀린 속도와 경쟁의 상징성을 띈다. 시인은 이런 현대사회의 부조리한 모순 구조를 은유적 풍자로 비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우리는 어떤 사물이 좋기(선하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좋다고 판단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욕망은 결핍에서 촉발된 필요악이란 뜻이다. 그런데 시인은 1연 3행에서 단호히 “3은 늑대, 4는 잠수함”이라고 직설 화법으로 치고 나온다. 현대인의 욕망의 가면을 벗기면 주린 창자를 채우려는 ‘늑대’들의 교활한 눈빛이 번득이겠다. ‘잠수함’ 역시 익명성 뒤에 숨어 온갖 사회악을 재생산해내는 은유적 상징이다. 시인은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8은 비행기/9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라고 열거와 반복으로 시의 호흡을 급박하게 밀어 올린다.
‘구찌’로 대표되는 무자비한 명품 소비를 부추기는 욕망을 ‘악어’로 상징했으며, 현대인이 서로가 서로에게 속고 속이는 교묘한 위장술을 ‘나무’라는 소재를 통해 드러낸 것은 욕망의 의표를 찌른 멋진 표현이다. 물론, ‘돌고래 쇼’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자, 삶이 궁극엔 한 편의 ‘쇼’임을 비유한 것이겠다. 그러한 욕망 덩어리는 자꾸 덩치가 불어나 절제할 수 없는 거대한 ‘코뿔소’로 변형된다. 한편, 한국 사회의 ‘빨리 빨리’ 문화는 ‘비행기’를 타고 전국토의 구석구석 급속히 퍼졌다. 이런 자본주의의 악습이 결국 이 사회가 정신적분열증에 병들었다는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기형의 ‘욕망 공화국’으로 바뀐 셈이다.
현대의 톱니바퀴 속에 끼인 개체로써의 나는 “전화기”를 들고 밤낮 누구에겐 가로 끊임없이 자신을 알려야만 하는 무의식적 병적 도착으로 장난감 같은 삶을 살다 죽어간다. 시인은 그 끝을 서로가 서로의 “살”을 뜯어먹고 끝내 함께 사라져버리는 ‘욕망의 아귀’ 지옥의 사슬로 보았다. 박상순은 1962년 서울에서 출생, 1991년《작가세계》봄 호로 등단한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이다. 시,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는 현대 사회의 ‘인간 욕망’의 ‘참과 거짓’을 깊이 성찰하게 한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출간
2002년 제 2시집 『구멍』 출간
2004년 제 3시집 『처녀와 바다』 출간
2007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출간
2014년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 『깍지』 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 『태양 셰프』 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 『저녁의 詩』 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