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황병승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황병승(1970~2019, 서울 출생)의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2005, 렌덤하우스중앙) 뒤표지에 실린, 김해순 시인의 표사는 정교하고 치밀하다. “황병승의 시는 영원히 미성년인 고아 소년, 이방 사람, 여장남자, 이미 죽은 자가 그리는 ‘앨리스 맵’이다. 시의 화자들은 ‘진짜 장면, 사라진 나라, 사라진 이름’을 찾아 시의 언술 속을 떠돈다. 이들은 이미 죽음을 살아내었기에 고정된 길을 가는 시적 주체가 아니다. 끊임없이 변용하는 과정 중에 있는 고무 찰흙 주체다. 이들의 떠돎 속에 한 사회가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나가면서 폐기 처분한 것들, 죽어 나자빠진 어린것들이 부상한다. 불안정하고 분열된 주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여성과 남성, 죽은 것과 산 것, 이미 떠난 자와 아직 떠나지 않은 자, 아버지와 아이, 말과 밥, 친구의 누나, 심지어 엄마와 나의 경계를 넘어 트랜스한다. 그들의 발화 속에서 가짜 지배 질서가 뭉개진다. 실제계와 상징계 사이의 거울이 뭉개져 수은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지금까지 신봉하던 동일성의 시론이 폭발하고 서정시의 영토를 통치하던 서정적 절대 주체가 권좌에서 하야한다. 그 텅 빈 무대를 주변인의 방황과 유희와 드라마가 어질러대기 시작한다. 그러자 또 한번, 우리 시단에 새로운 시의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황병승의 시는 모름지기 현대를 사는 시적 자아의 인식은 저 자연이 아닌 문화적 중재에 의해 성장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명시적으로 증거한다. 그의 시에는 무수한 텍스트들이 중첩한다. 그는 그 텍스트들을 비틀거나 다시 재단해서, 현대 남성이 잃어버린 것들, ‘여성, 자궁, 죽음’ 등을 가상적으로 착용한다. 이러한 잰더 역전의 과정 속에서 억압된 욕망의 놀이(가족 구성원의 역할극 놀이)가 상연되고, ‘시코쿠’가 되거나 ‘쟝’이 된, 문화적 이미지에 사로잡힌, 그러나 어떤 경계도 넘나들 수 있는 반죽덩어리의 시적 주체가 새로이 탄생한다. ‘나’에게로 ‘나’ 아닌 모든 것이 삼투하는 시적 주체가 등장한다. 이렇게 젠더와 가족 주위의 경계를 사뿐히 뛰어넘은 신인간 화자는 남성과 자아의 고착 상태가 그대로 투영된 우리 시의 거울상을 변화시키고자 엔트로피를 분출하다. 그러자 시적 주체의 무의식적 과정들(강박과 분열, 비밀과 거짓말, 유희와 불길)이 의식의 담론 속으로 역류하고, 역설적으로 우리들 현존재의 본질이 명경지수처럼 마주 보인다. 그러기에 황병승의 ‘어둡고 격렬한 연주’를 들으려면 “나는 혼돈의 음악을 연주하는 대담한 공주를 두었나니 고리타분한 백성들이여, 기절하라! 단 몇 초만이라도”라는 시인의 절규를 들어야 하다. 그러면 교양주의와 복사, 일상성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한국 시단에 부재의 신세계에서 마악 도착한, 영원히 자아의 감옥을 탈옥 중인 시적 화자의 새 발성이 들려올 것이다.”
황병승의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를 처음 읽었을 때의 당혹감은, 이상의 「오감도」를 만났을 때만큼 충격적이었다. 「주치의 h」, 「여장남자 시코쿠」, 「원 볼 낫싱」, 「왕은 죽어가다」 등등 서정성을 완전히 포기한 낯선 작법은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란 명제를 근본적으로 뒤집어보게 하는 정체성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난해를 넘어 기존 언어체계로 소통 불가한 이런 작품을 굳이 해독해야 할지 말아야할지도 헷갈렸다. 시의 산꼭대기에 오르는 방법이 아무리 여러 방식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여장남자 시코쿠』는 30년 시 공부한 내게도, 읽는 것조차 고행이었다. 그러나 수년 간 이 시집을 꼼꼼히 독시하면서 깨달은 점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할 것이 아니라, ‘다름’이 ‘명품’을 만든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가 출판사 사정으로 절판되었다가 『문학과 지성사』(2003)에서 다시 복간된 것은, 그 만큼 황병승의 시가 새로운 형식을 선보인 90년대 이후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작품임을 증명한 셈이다.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황병승도 밝히고 있듯, 선배나 동기, 선생님들로부터 그의 시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한 사람은 거의 없었나보다. “난해하다, 시라고 보기 힘들다, 이런 식으로 쓰면 등단도 힘들고 등단해도 문단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등등 혹평 일색”이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그의 시가 이렇게 복잡다단한 형식은 아니었다고 했다. 20대 후반 늦은 나이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시를 습작했고,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민한 건 대학 졸업을 앞둘 무렵에서였다. 그는 이 시대의 “뒤죽박죽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뒤죽박죽의 형식이 필요했다”면서 자신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던 시기에 섭렵한 미술이론서, 실험적인 영화나 음악 등이 지금의 미래시를 낳은 계기였던 셈이다.
『여장남자 시코쿠』에 수록된 「커밍아웃」은 시대의 금기를 이슈화한 획기적인 작품이다.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커밍아웃’이라고 한다. 영어 ‘come out of closet’에서 유래한 용어로, 번역하면 ‘벽장 속에서 나오다’는 뜻이다. 동성애자(同性愛者)들이 더 이상 벽장 속에 숨어 있지 않고, 밝은 세상으로 나와 공개적으로 가족이나 직장, 학교 또는 일반 사회에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異性愛者)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심리적 갈등을 겪거나, 동성애자임이 알려져 각종 사회적 멸시와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서구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동성애 문제가 사회문제화 되기도 하였다. 커밍아웃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시각을 극복하고, 동성애자들 스스로가 확실한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여성동성애자를 칭하는 말은 레즈비언, 남성동성애자를 일컫는 말은, 게이(gay)이다. 한편, 동성애자,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 transsexual) 등 성적소수자 전체를 퀴어(queer)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성애자를 일반적이라고 보는 사회를 비판하는 취지에서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을 역설적으로 이반(二般, 또는 異般)이라고 부른다.”(두산백과 참고)
먼저, 「커밍아웃」은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란 시행을 통해 성정체성의 혼란을 불러일으키며, ‘나’와 ‘뒤통수’를 은유를 통해 동일시한다. 화자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진다며, 자신의 진짜를 ‘뒤’라며 노골화한다. 이 때 ‘당신’은 동성애자인 동시에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중의적 화법으로 암시한다.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뒤로 걸을까 봐요” 이성애자를 당연시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동시에 ‘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동성애자의 본능적인 고백이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릴 정도의 절실함에 스며 참혹한 비애를 느끼게 한다. 또 화자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라고 동성애자임을 스스로 고백한다. 그럼 ‘진짜’’는 무슨 의미이며, ‘항문’은 또 어떤 뜻일까. 화자는 나와 항문을 은유로 직접 연결하여 ‘동성애자’야말로 이성애자와 똑같은 성(性)의 주체임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더럽고 혐오스런 항문을 나의 진짜라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하겠다는 화자의 독백은 동성애 역시 진정한 사랑의 발로임을 온몸으로 항변하고 있다.
독자의 허를 찌르는 「커밍아웃」의 핵심은 3연이다.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다며, 화자는 동성애적 본능이 인간 누구나 가지는 감정임을 폭로하는 동시에,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할 만큼 절박한 본능임을 “죽은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를 등장시켜서까지 그 진정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부끄러워요? 악수해요//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여전히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다수의 사회적 시선은 싸늘하다. 언젠가는 한국 사회도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악수’할 날이 올 것이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저녁의 詩』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