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윈 무도회
황성희
패리스의 첫 남자가 궁금해? 회색의 방문 앞을 서성이는 독고준. 싫은 건 싫다고 말하렴. 승복의 입에 돌을 넣고 꿰매는 빨간 모자. 옥수수 낱알 위로 검은 피를 흩뿌리는 바스키아. 알리바바와 40인의 김신조, 아직 못 읽었다고? 널브러진 흑백의 시체들 따라 롱 테이크. 아리랑이 삽입되자 킬빌의 닌자들 발끈 솟아오르고. 상투 하나 잘랐을 뿐인데 어제는 벌써 옛날이 되다니. 예를 갖추라. 물렁물렁한 캔버스 방패삼아 나타난 달리. 단단한 채로 썩고 싶다는 거겠지. 고뇌와 기만 사이 납작 갇힌 채. 어찌 이토록 아무 문제없사올지. 길동 읍소하며 가로되. 율도를 세울 명분을 주옵소서. 그때, 가다마이 입고 나타난 모던 보이. 윙크하는 그에게 제대로 된 인사 가르쳐 주마 화장실로 불러내는 단재. 두루마기의 실용성을 가르쳐주겠다는 다산. 발음이 수상쩍다며 모던보이를 신고하자는 독수리 훈련병. 나만 졸졸 비춰줄 미러볼을 원하는 것은. 확성기 높이 쳐 든 레지스탕스. 반역입니다. 모조리. 깡그리. 다 이름 붙여 버릴 거야. 담요로 태양을 가린 채 해변의 모래알 세고 있는 개구리 왕눈이. 마릴린은 숨이 턱에 차 뛰어든다. 늦었다고 걱정 말아요.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파티. 알몸이면 어때. 어서 같이 흔들어요. 이 텅 빈 여백 천지 속. 뭐라도 되어 길이길이 남아 보자고요.
시란 어떤 면에선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불가능의 시’일 것이다. 끝없이 새로운 시가 등장하고 신선한 시어들로 차고 넘친다. 시는 현재이면서 과거이고, 과거이면서 미래이다. 하여, 시 이전과 시 이후는 같거나 다르다. 서정시는 줄곧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성에 집중했다. 황성희의 시 「할로윈 무대회」는 주체와 타자의 전복을 통해, 다의성을 추구한다. 이런 존재의 부재성은 부정과 역설을 통해 모순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보인다. 결국 그녀는 할로윈 축제의 특별한 복장, 속임수, 유령의 은유를 통해, 전시대 마초들의 페르소나(가면을 쓴 인격)를 까발리고 있다. 이런 역사 속의 말 걸기 혹은, 인물의 드러냄과 감춤, 사라짐을 통해 자신만의, 시의 ‘무도회’를 연다. 시집 『4를 지키려는 노력』(민음사, 2013) 속에 수록된 이 시는, “일상적 현실 속의 권태와 불안, 현대적 주체의 불안정한 의식에 관한 보다 예리한 시적 언술”(심사평-김기택․이광호)의 주체로 인정받은 바 있다. “교양 체험에 기반한「할로윈 무도회」는 다양한 텍스트와 캐릭터들(패리스 ․ 독고준 ․ 승복 ․ 바스키아 ․ 김신조 ․ 달리 ․ 길동 ․ 단재 ․ 다산 ․ 마릴린)이 등장한다. 그런 다성성(多聲性)의 시적 내러티브는 어떤 순일함이 아닌 하이브리드(hybrid)의 세계를 지향하며, 끊임없는 수다와 할로윈(Halloween) 축제의 무도회 장면을 연출한다. 하여 어떤 이념과 현실, 명분과 실질, 미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고금(古今)의 시간과 동서(東西)의 장소도 매한가지다. 언어라는 춤의 다양성과 그로테스크한 상상은 “텅 빈 여백 천지 속”을 배경으로 해서 가능한 일이다. 이름 없는 존재에 “이름(을) 붙”이고, “장소를 공간으로, 공간을 장소로 변환시키는”(메를로 퐁티,『지각의 현상학』) 이야기는 이렇다 할 두서도 없고 비문(非文)이기 일쑤다. 시간과 이야기의 비밀은 서로 다른 사건과 인물들, 고전과 현대를 새롭게 잇는 원리와 방법으로서 알레고리와 리믹스(remix)에 있다. “현재 속에서 과거의 현존이 근대성의 핵심”이라면, 이 시의 모더니티는 ‘~되기’ 또는 회색의 점이지대(transition belt)에 있다.”(김상환 평론가)
황성희의 초기 시는, 현실의 지루함, 권태, 현대 사회의 불안, 가상현실에 대한 혼란 등을 중요한 시의 테제로 삼았다면, 시「할로윈 무도회」는 축제를 통해 근대적 ‘꼰대 의식’을 까발리고 있다. 시는 시간의 점(들), ‘spots of time’이다. W․워즈워스의 이 말은 ‘기억 속에 떠오르는 깊은 이미지나 풍경’을 뜻한다. 황성희의 시 행간은 어쩜, 수다의 점들로, 인물간, 세대간, 몸 바꾸기로 읽힌다. 이런 이미지의 연결은 시간의 점자처럼 더듬거리기도 하고, 점묘처럼 흩뿌려지기도 한다. “그 시간과 존재 사이, ‘작품이라는 현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체험하고 이해하며 사유할 것인가? 시의 비밀은 “시적이지 않은 언어들의 소음 한가운데 있다. 그것은 마치 자유로이 걸린 종(鐘), 그러나 가벼이 그 위로 내려앉은 눈발로 인해 제 곡조를 내지 못하는 종과 같다. (……) 아마도 시에 대한 이 모든 해명은 종에 떨어지는 눈일 것이다.” (하이데거,「횔덜린 시의 해명」)“(김상환)
시와 비시의 경계를 조금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 호감과 반감 사이쯤이다. 황성희의「할로윈 무도회」는, 소위 기성 시에 대한 반감, 보편화된 예술의 전복을 꿈꾼다. 이러한 일탈, 혹은 낯선 사유는, 사회에 대한 반감, 나아가 체제나 작품, 고전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확산된다.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의도적 시 쓰기의 전형을 상기시킨다. ‘가장 비시적인 것으로 가장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보통 이런 작업들은 역사 속의 사건들이 개입되며, 상상력과 버물려 희화된다. 시「할로윈 무도회」는 결국, 현대를 비판하기 위해,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근대를 빌어 패러디한 것이다. 의도와 모호 사이에, 그녀의 의미들은 상충되며 재배치된다. 이런 다층적 시어는 김상환 평론가의 지적처럼, 전근대적인 낡은 인식들을 뒤집어엎는 포즈(pose)이자, 또 다른 ‘모험 찾기’의 연장이다. 하여 이 시는, 사회적 병폐와 체제의 선전을 비판적 시각으로 뜯어보게 하는 풍자이자, 당대 젊은 시인들의 정체성 혼란의 표징이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저녁의 詩』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