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서종택
질경이는 엎드려서 언덕으로 올라가고 바람은 송화가루 뿌리면서 골짜기로 내려갑니다. 그러면 제비꽃은 재빨리 꽃을 피우고 나비는 날아가는 하늘을 갖고 오지요. 나는 날아가는 하늘 속으로 두 손을 이리저리 넣어봅니다. 그러다가 그만 한쪽 발을 들면서 나비가 버리고 간 하늘 속으로 나동그라집니다. 조그만 언덕은 뒤집어지면서 나비 속으로 곤두박질합니다.
얘야, 작은 나무뿌리나 돌멩이를 조심하여라. 넘어지면 무르팍을 다치지 않니? 하지만 아빠, 아빠는 넘어질 줄도 모르면서 그러셔요. 나는 하늘에다 흙을 묻히고 나 때문에 더욱 기울어진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아빠, 아빠는 가만히 서 있는 게 자랑인가요? 가만히 서 있는 나무를 가만히 세워 둘 줄밖에 모르시는 아빠. 나를 일으켜 세우고 흙을 털어 주시는 흙 묻지 않는 아빠. 나비의 하늘 속으로 나동그라지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아빠는 왜 모르실까?
나는 다시 한 번 나동그라지면서 아빠가 바라보는 언덕을 뒤집어놓지요. 깜짝 놀라서 들여다보는 아빠 눈 속으로 나비가 깜짝 놀라 달아납니다. 그 뒤를 넘어지고 일어나며 뒤죽박죽 섞여버린 언덕이 따라갑니다.
서종택의 「나비」는 시의 소재를 그대로 제목으로 썼다. 화자 ‘아이’와 ‘아빠’의 문답을 통해 「나비」의 시 행간 속에 감춰둔 시적 진실을 독자들이 읽어내길 바란다. 그의 「나비」를 읽고 있으면, 내가 나비인지 나비 이야기 속의 장자가 화자인지 그 경계가 아리송하다. 1연부터 묘하다. 언덕을 따라 질경이가 피었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질경이가 엎드려서 언덕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질경이란 시적 소재를 의인화하여 생기를 불어넣어 시행을 온전히 자기류로 장악했다. “나비는 날아가는 하늘을 갖고” 온다는 그 다음 행의 표현은 환타스틱하다. 나비가 허공을 날아가는 날개짓을 ‘하늘을 갖고 온다’는 시적 표현으로 바꾼 그 환유도 기막히지만, 하늘 속으로 “두 손을 이리 저리 넣”는 시적 화자의 무중력 상태 역시 아찔한 시 맛이다. 하늘로 날아가고 있는 나비의 시각적 이동을 하늘을 ‘갖는다’라고 촉각화 시킴으로써, 허공이 갑자기 질량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시적 화자가 “날아가는 하늘 속으로 두 손을 이리저리” 넣는 장면도, 읽으면 읽을수록 기묘하지만, “나비가 버리고 간 하늘 속으로 나동그라”지면서, 굴러 넘어진 언덕을 “나비 속으로 곤두박질” 친다는 이 표현은 기기묘묘(奇奇妙妙)하다.
「나비」는 4연 산문시로 되어 있지만 지루하거나 시에 군살이 전혀 없는 무위의 시로 읽힌다. 마치 시인의 꿈속 한 장면을 현실 공간 밖으로 잘라 내어온 것처럼 사물과 사물, 공간과 시간, 시적화자인 나와 아빠가 슬로우 모션처럼 허우적거리며, 이상한 세계 속의 상(象)으로 존재한다. 서종택은 1948년 경북 군위에서 출생했다. 197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호루루기」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나비」는 무려 25년만에 낸 첫 시집 『보물찾기』(2000, 시와시학)에 수록되어 있다.
평론가 이숭원은 그의 「나비」를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 몸에 전혀 흙 묻히지 않고 자연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것은 직선의 삶이다. 인간 사회의 경제 논리는 그러한 직선의 삶을 강요한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나비에게 손을 뻗치고 숲에 나동그라지는 삶이 바로 곡선의 삶이다. 아이는 지금 아버지에게 직선의 삶에 머물지 말고 곡선의 삶으로 나아가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를 걱정하며 직선의 삶을 가질 것을 지시한다. 아이와 아버지의 생각의 차이는 자연과 나를 하나로 보느냐 분리된 것으로 보느냐의 차이다. 아이의 세계 속에서는 나비의 하늘이 자기의 하늘이며 나무의 흙이 자기의 흙이다. 자연의 모든 것이 동일화되어 ‘뒤죽박죽 섞여버린 언덕’이 아이의 세계이고 엄정하게 구분되고 질서 있게 구획된 공간이 아버지가 살고 있는 문명의 세계다.”라고 평했다.
나 역시 시적 화자 “아이”의 시선처럼, 직선보다 곡선이 더 좋다. 사과의 허리둘레도 곱거니와 초승달의 눈썹은 또 얼마나 만곡(彎曲)인가. 이 시는 경쟁보단 자유가, 속도보단 느림의 미학에 훨씬 기울어져 있다. 안도현도 그렇게 말했다. “난 어슬렁거리며 걷는 시간을 좋아한다. 어슬렁거려야 미세한 데 눈길을 줄 수 있고, 세상이 요구하는 질서의 뒤편을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아마 그도 어슬렁거리며 걷는 일로 하루를 다 소비하는 자일 것이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되도록 많이 걸을 것을 주문한다. 한적한 오솔길이나 들길이 아니더라도 좋다. 재바르게 걷지 말고 ‘따복따복’ 걸어라. 모든 길은 세상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통로다.”
어쩜 서종택의 「나비」는 굽은 것이 오래간다는, 장자의 곡즉전을 말하려 했는지 모른다. 어른들의 질서의 직선 세계보다 ‘뒤죽박죽 섞여버린’ 아이들의 무질서의 곡선 세계를 더 찬양하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에는 수많은 현상의 소리가 있다. 바람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새 소리, 고함 소리, 기계의 소음 등 실로 다양한 소리가 섞여 산다. 시인은 이 모든 소리와 함께 꽃피는 소리, 나비가 하늘을 끌어당기는 소리, 텅 빈 허공의 울림소리가 어떻게 함께 공존할 수 있는지 ‘뒤죽박죽’이란 한 단어 속에 함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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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저녁의 詩』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