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염전
김경주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 온다
물 안에 스며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의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의 쇄골이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펴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들을 본다
1976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한 김경주의 「저녁의 염전」은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 랜덤하우스) 속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일상성의 파기 혹은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시 창작상의 오래된 두 가지 관점인 시를 ‘영감’의 문제로 볼 것인가, 문체의 새로운 ‘표현’으로 접근할 것인가의 두 축을 교묘히 이어주는 접점에 「저녁의 염전」은 놓여 있다. 시행 하나 하나를 뜯어보면, 마치 화자는 시의 인식의 문을 열고 ‘신 지핀 자의 몰아적(沒我的) 언어’ 세계로 들어가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상상력이 풍부하다. 시인에게 있어 신(神) 지핀다는 뜻은 신의 부름을 받은 징표이며, 신의 말을 인간의 언어로 심장에 새길 수 있음을 허락받은 표식이다.
한편, 「저녁의 염전」은 다각도로 초점을 맞춘 촬영기법에 의해 시의 장면이 교묘하게 편집되어 있음도 직감한다. 각 시행의 이미지가 한 장면(scene)을 구성하고, 이 장면들을 연결해 보면 한 편의 완성된 시나리오처럼 멋진 시 세계가 펼쳐진다.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 염전의 어둠은 온다”고 한 첫 행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1994년《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심보선의 시 「풍경」 이래, 급속도로 현대 젊은 시인군(群)에 퍼진 영화의 한 장면을 따온 것 같은 영상 시법은 이제 일반화되었다. ‘어둠이 온다’는 무의미한 일상적 표현을 시인은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란 구체적인 의태, 촉감적 표현으로 살짝 바꿨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시에 있어 ‘시는 표현이다.’란 명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실증이다.
화자는 3행에서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 온다 /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이라고 표현했다. 저녁 어스름이 몰려올 때 그늘진 섬을 본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에 실려 오는 ‘그늘’을 본 사람은 몇일까. 무시무시한 시안이다. 두 시행을 겹쳐 클로즈업시켜보면,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그리고 화자는 곧바로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는 겨울 저녁 바다로 ‘초점’을 옮겨갔다. 이때부터는 폐선 선실 바닥의 어린 갈매기의 얼룩이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란 절묘한 시구에 모인다. 그 다음은 저녁 염전 위로 번진 밀물과 노을, 그리고 화폭 가득 퍼져 내려오는 흰 눈의 아름답고 슬픈 서정의 풍경 묘사이다. 마치 하나의 풍경이 다가서면 다른 풍경이 이어서 겹치고, 다른 풍경이 물러나면 이내 하나의 풍경만 또렷이 형상을 드러내는 그런 자연의 묘사이다.
특히, 15행에서 “희디 흰 물소리” 속의 공감각적 표현은 상당한 함의를 내포한다. “흰”의 시각적 이미지를 “물소리”의 청각적 이미지와 결합시켜 죽음의 비유인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소리”로 인식하길 요구한다. 또한 ‘흰색’은 죽은 자의 부활을, ‘물소리’는 도솔천을 건너는 복합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김경주의 시적 정신의 ‘초점’은 동양적 사유의 ‘찰나적 홀림’에 뿌리박고 있다.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 몇 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 물의 내장들을 본다” 20행에서 표현한 이 시행은 절묘한 선적(禪的) 화두를 독자들에게 던진다. “물의 내장을 본다” 멋진 화두 아닌가.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저녁의 詩』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