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지
류경무
비를 기다리며 팬지를 심었지 흙의 자물쇠를 따고
나는 팬지를 거기로 돌려보내지
팬지는 위로만 꽃, 아래는 흙의 몸뚱이를 가졌지
나는 꽃을 움켜쥐고 아래를 쓰다듬었지
나를 만진 건 당신이 처음이야
옛날이었지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
거긴 아주 물컹한 곳이었고
토악질하듯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처음의 빛으로 구워지기 시작했던,
빛의 날들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
나는 수많은 팬지를 실어나르지
팬지는 색색의 여린 잎을 벌려 다른 나라의 말로 조잘거리고
나는 그 나라의 말로 대답해주네
팬지를 심으며 나도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지
참 좋은 어딘가로 팬지와 함께 땅에 붙어서 가고 싶었지
팬지는 자꾸 줄어들고 있었네
하나둘 팔랑거리며 팬지는 내 손을 떠나갔네
류경무는 1966년 부산 출생으로 1999년 <시와반시>로 등단하였다.「팬지」는 시집『양이나 말처럼』(문학동네, 2015)에 수록되어 있다. 우선, 시「팬지」는 대상을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보고 있다. 척 보면 아는 것이, 시의 기미와 기척이다. 시는 설명해서 넓어지는 언어가 아니라, 설명하면 도리어 의미가 궁색해지는, 언어 이전의 언어이다. 그런 측면에서「팬지」는 팬지를 중심으로 땅의 무늬와 하늘의 추상 세계로 양분된다. 그것은 ‘어떤 생성 이전의 근원’을 이야기하려고 한다.「팬지」는 표면적인 언어보다는 언어 이전의 기(氣)의 세계를 함의한다.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상보다는 형상이전의 이미지에 더 포인트를 둔다. 그때 느껴지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팬지로부터 느낀 팬지 이전의 어떤 존재를 내포한다.
시인은 존재의 처음을 만지는 사람이다. 하여, 류경무는 “흙의 자물쇠”를 딸 줄 안다. 팬지의 아래를 쓰다듬기도 하고, “나를 만진 건 당신이 처음”이라는 ‘비밀’도 고백한다. 이때 팬지는 당신으로 은유된다. 오랜 슬픔과 외로움을 다 견딘, 너와 내가 된다. 흔히 그를 식물성 시인이라고 칭한다. 사물을 다른 존재의 형질로 변이시키거나 아예, 타자의 언어로 둔갑시킨다. 그가 믿는 것은 언어일까, 언어 이전의 느낌일까. 류경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거긴 아주 물컹한 곳”을 만나기도 한다. 수많은 팬지를 실어나르고, “색색의 여린 잎을 벌려 다른 나라의 말로 조잘거리”는, 낯선 팬지들을 만나곤 한다. 팬지는 시인의 말을 하고, 시인은 팬지의 말을 한다. 류경무는 식물의 언어로 땅의 말을 하고, 꽃의 언어로 하늘의 말을 한다. 하여, 류경무는 “흙의 몸뚱이를 가지고 꽃을 밀어 올리는 시인이다. 대지가 건강해야 꽃도 건강하다. 그의 하체는 흙(대지)에 뿌리박고 있다. 식물은 흙에서 태어나고 흙에서 성장한다. 그는 마침내 “꽃을 움켜쥐고 아래를 쓰다듬”는다. 꽃은 저절로 피어난 것이 아니므로 “흙의 몸뚱이”를 가진 “아래”에 감사하는 것이다. 모든 “아래”는 거룩하다. 무엇인가를 높이려면 자신은 항상 “아래”에 있어야 한다. 피어난 것의 근원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아래”에 있었다. 그는 “아래”를 쓰다듬는 시인이다. 그의 발목은 대지를 향해 뿌리를 내리는데 그의 눈은 영원을 응시한다.”(김수상)
그의 시집 속에는 낯선 시의 풍경들이 빼곡하다. 표제시인「양이나 말처럼」은 말장난의 시다. 양말을 벗다가 찰나에 나온 시적 착상이 돋보인다. ‘사물을 통해 과연 시인은 무엇을 발견하는가.’ 양말을 두 단어로 떼어 놓으면, 양(羊)과 말(馬)이 된다. 언어유희를 하다가 생겨난 재미있는 시의 발상이리라. 이런 단순한 말놀이 시는, 번뜩이는 재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동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사물에 대한 끈질긴 사색의 결정이다. 하루 종일 ‘양이나 말처럼’ 사는 일상의 행간이 양말을 벗으면서, 놀라운 시적 상상력으로 번진다. 결국 양말처럼 널브러져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의 풍경을 비유로 표현하였다. 시를 본다는 것, 그 본 것을 시로 쓴다는 것은, 굉장히 외로운 작업이다. 시는 일상을 통해 바라본 발효된 언어이다. 류경무의 시,「팬지」와「양이나 말처럼」은, 흘러간 수많은 밤들을 통해 잠들지 못한 것들의 뒷면을, 식물성이나 동물성으로 치환한 시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 대다수의 시가 개인적인 중얼거림에 머물러 있다면, 그는, 개인적인 서정이 전체적인 서사로 확대돼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고, ‘어떤 틀 안’에 갇힌 언어가 아니라 ‘틀’ 밖을 지향하는 언어로 노래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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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저녁의 詩』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