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션
김사람
음악을 만진다
폐병 환자의 한 모금 담배처럼
당신 주위로 스미는
트럼펫의 마지막 호흡
자기를 조소하지 않고서는 감히
밤새워 저 꽃을 틔울 수 없다
아스팔트에 핀 들국화는
죽어버린 여자를 사랑했다고 믿기로 한다
음이 나뉘는 순간 닿을 수 없는
분열된 사랑에게 고독을 느껴온
일렉기타 그리고 나
전류로 이어진
들국화와 여자 사이
허공을 찌그러뜨리며 나비가 난다
별이 소리 없이 하늘을 박는 동안
나는 땅에 박히며
침묵을 완성할 때까지
음악을 눈동자에 담아둬야 한다
눈을 자주 깜빡일 것
눈물 한 방울에
음표 하나씩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아픈 사랑은 하지 말 것
머리카락이 긴 짐승의 글씨체를 상상하며 연필을 쥔다
아름다운 것은 치명적일 것
어떤 일에도 덤덤해져야 한다
더듬이 하나 잃은 귀뚜라미
서쪽으로 기우는 하늘을 삼킨다
낮아지는 세계
올려다본 당신은 울고
처녀의 속살보다 여린
밤의 속살 때문에
오늘 밤은 내내 환청이 필요하다
난해시로 통칭되는 2000년대 이후 현대시는 이전의 서정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놓인다. “최근 들어 전면화 된 작품을 둘러싼 소통의 어려움이나 난해함의 문제는 우리 시대 문학의 현주소를 드러내는 주요 징표이다. 난해성은 시 장르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고 어느 시대에나 제기되었던 문제지만 최근의 상황은 이전과는 양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그것은 시적 난해성이 일부 시인들에게서만 보이는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에 두루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 그래서 세대적 분기(分岐)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난해성은 ‘젊은 시인들’에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젊은 시’의 징표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적 난해성은 시적 현실이나 시 언어에 대한 감수성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온당해 보인다.” (김문주,『저녁의 詩』p114)
난해시의 한 가운데에 있는 김사람(1976∼, 경북 의성 출생)의 시 「디스토션」은, 시집 『나는 이미 한 생을 잘못 살았다』(천년의시작, 2015)에 수록되어 있다.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디스토션’(변형/일그러짐/뒤틀림)의 시적 현실은 세계와의 불협화음이자, 기존 체제에 대한 전복적 사고이다. 시인은 음과 리듬의 문제를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문제로 시 속에 끌어들인다.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세대에 따라 현실이 달라 보일 수 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또 어떤 면에서는 세대 간 전도된 언어의 관점의 문제는 굉장한 부담이기도 하다. 특히 시적 소통의 문제에 부딪히면 서로 간에 안타까움마저 든다.
이 시의 첫 행은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하다. “음악을 만진다” 는 표현은, ‘음악을 듣는다’에서 한 발짝 더 깊숙이 찌른 표현이다. 베이스 기타리스트로써의 시인의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다.
“폐병 환자의 한 모금 담배”로 은유된 기성 체제는 시인에게, 숨막히는 규율이자 억업의 기제로 작동한다. 즉, 「디스토션」은 일상의 악보에 철저하게 따라 사는 기계화된 인간을 비유한다. 그런 사회는 “자기를 조소하지 않고서는 감히 / 밤새워 저 꽃을 틔울 수 없다” 만약 그 악보에서 한 음이라도 잘못 누르면 연주 자체가 뒤틀려버리는 수직적 사회의 붕괴를 의미한다. 하여, 그는 “음이 나뉘는 순간 닿을 수 없는 / 분열된 사랑에게 고독을 느껴온 / 일렉기타 그리고 나 / 전류로 이어진 // 들국화와 여자 사이 / 허공을 찌그러뜨리며 나비”가 된다. 개인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사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모두「디스토션」이다.
그래서 그는 이 세계가 과연 완벽하게 잘 짜인 것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겉으로 잘 포장된 세계일 수 록 부조리와 모순이 판을 친다. 그런 것들을 시인은 역으로 뒤집기도 하고, 어떻게 바꾸면 내가 바라는 세상이 올지를 “머리카락이 긴 짐승의 글씨체를 상상하며 연필을 쥔다”. 김사람은 이런 시적 상황을 대담에서 고백한 적이 있다. “「디스토션」을 쓰면서, 국가 폭력, 사회 억압, 직장의 규율이란 가면을 쓴, ‘지휘자를 걷어내자.’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삶의 교향곡에 즉흥적인 자신만의 애드리브를 가미하고 싶었다. 이 세상이 규율과 감시 속에 통제되는 것은 ‘지휘자’ 때문이 아닐까라는 의혹이 들었다. 결국 교향곡처럼 완벽해 보이는 기존 시의 벽에 나름대로 균열을 가해 나의 목소리를 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시인에게「디스토션」은, 이렇게도 비유된다. 록음악 연주를 할 때 기타와 연결된 페달을 밞으면 부드러운 기타 소리가 찌그러진다. 흔히 말하는 헤비메탈의 쇠 긁는 소리로 효과음을 내는 것인데, 그게 도리어 록밴드의 음악을 완성한다. 그러니까, 김사람의 시는 바로 이 세계 자체를 찌그러트리면서 불협화음도 하모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 시의 도입부는 <본 투 비 블루>라는 영화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 연주를 새벽에 듣는데, 그 소리가 시인의 앞에서 하얀 연기가 돼서 부서지는 듯했다고 한다. 결국「디스토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밤은 내내 환청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저녁의 詩』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