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가 있는 골목
- 李箱에게
변희수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패러디의 어원은 고대 희랍어 'parodia'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이미 만들어진 작품의 내용이나 형식을 모방하되, 모방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새롭게 변주해 창조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표현 기법이다. 변희수의「의자가 있는 골목」은 이상의「거울」을 페러디 하여 새롭게 승화된 작품이다. 마치 시인 이상(李箱)의 혼령이 ‘의자’에 앉아 있기라도 한 듯이, 시적 화자가 조곤조곤 말을 걸고 있다. ‘의자’가 함의하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파편적 의미들을, 깊이 있게 찾아내 대화의 시법으로 끌고 간다.〈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이 시적 표현은, 마치 현대 사회가 ‘의자’로 상징화된 듯 보인다. 현대사회를 의자의 시대라고 정의해도 무방하겠다. 지금 나도 의자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우리는 출근하여 집에 갈 때까지, 아니 집에 가는 도중인 지하철, 버스, 택시 안까지도 의자에 의지해 실려 간다. 아마 소수는 의자와 함께 달 위에서 밤을 새울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시인은 의자가 참 의젓하다고까지, ‘의자’를 ‘의지’가 있는 사물로 인격화한다.
결국 시인이 의자를 통해 동시대인에게 말 하고자 하는 의미는, 의자를 아무리 옮겨 다닌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예컨대, 과장이 부장이 되고, 이사가 되고, 사장이 되더라도, 상대와 ‘대화’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의자’의 깊이를 평생 모르고 살다 가는 불행한 부류들이다. 하여, 이 불통의 시대에 변희수의「의자가 있는 골목」은 상당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어떤 시대이든 ‘의자’는 반드시 필요 하지만, 의자를 잘못 이용하면, 빙빙 주변만 돌다가 결국 자신의 인생을 헛발질하고 만다는 일침도 숨어 있다. 결국 시인에게 있어 ‘의자’의 존재는 그렇다. 밤을 세워서라도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백지에 ‘시 쓰기’를 강요하는, 침묵의 의지이겠다. 물론, 의자에 앉아 잠시 몽상이라도 잠길 양이면, ‘의자’는 시인의 감미로운 연인이 되기도 한다. 서로의 기분을 너무나 잘 간파하기에 ‘의자와 시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증과 성찰의 연인 관계이다. 밀양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한 변희수의「의자가 있는 골목」은 201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저녁의 詩』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