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물
이규리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다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이규리의 1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은 ‘타자와의 동일성’이란 시적 주제를 탐구했다면, 2시집 『뒷모습』은 아버지로 은유된 억압기제에서 벗어나, 사물의 자유로움을 추구했다.
3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는, 타자와의 관계를 ‘미학의 관점’으로 끌어올린다. 그녀의 시들은 대게 일상을 통해 새롭게 깨달음의 세계로 연결된다. 이런 깨달음은 ‘절제와 균형 감각’에서 오는 현실의 방향등일 것이다. 하여, 그녀의 시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풍경의 틈에서 비집고 나온 일상의 뾰족한 어떤 것에 ‘낯설기’ 하기다.
그래서 이규리의 시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그런 일들에서 얻은 ‘기미’를 통해, 삶에 대한 반성으로까지 치고 나간다. 사물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담백함을 추구한다. 그녀는 잡지 대담에서 자신의 문학적 습관은 ‘일종의 금기, 욕망, 갈등, 억압의 상징인 아버지로 통칭된다.’고 토로한 바 있다.
3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2014, 문학동네)에 수록된 「많은 물」은, 형상미학의 측면에서 보면 독자적 언어 사용 기술이 돌올하다. “결국 다 젖게 하는 사람은 /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행간의 비극과 역설, 아이러니가 이 시를 깊게 한다.
「많은 물」의 시적 상황은, 누군가를 좋아했는데, 그 사람은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고, 좋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비극은 최고조가 된다. 하여, 그것은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이 되고, “젖고, 아프게” 한다.
이규리는 어느 대담에서 시가 태어난 자리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데 비가 굉장히 많이 쏟아졌어요. 윈도브러시가 바삐 움직여야 할 만큼 비는 퍼붓고, 그 사람이 불현 듯 보고 싶고, 비는 줄창 내리고, 온갖 상념이 너무 많아 갓길에 급주차를 했어요. 해놓고 보니, 내가 차 안에 있지만, 밖에 퍼붓는 저 비에 흠뻑 젖어있다는 느낌이 든 거죠. ‘한 때는 생각만 해도 나에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인데, 결국 오늘 나를 젖게 한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아픔이 밀려 왔죠.” 그는 「많은 물」에서 그 사람과 비를 동일시한다.
사랑과 이별, 따뜻함과 차가움, 밝음과 어둠, 이런 사물의 양면들을 비극과 일치 시킨다. 현실로 은유된 ‘윈도브러시’는 소재 선택의 압권이다. 결국 화자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슬픔의 질량을 반복해 밀어내어야만 하는 그것은, 아픔이자 애절의 표징이다.
서정시의 극치는 사랑과 이별 사이에 놓인 비극에 있다. 사랑의 갈등은 몸의 통증을 통과해 결국, 아이러니와 역설의 공간을 지나, 궁극엔 카타르시스를 낳는다. 모든 비극적 사랑의 결말이 다 그렇진 않지만, 이규리의「많은 물」의 시적 테제인 ‘윈도브러시’와 ‘빗물’, ‘막무가내가 된 나’와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은,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는 시적 거리 속에 존재한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저녁의 詩』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