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무덤들
엄원태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내릴 것만 같다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 있다
나는 저기서 표면 장력처럼 널 만났다
하지만 너는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너는, 하면서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저 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왜, 엄원태는 「물방울 무덤들」에서 자신의 정서를 대신할 ‘객관적 상관물’로 ‘물방울’을 썼을까. 시는 사건이 서사에 개입하는 순간 넓고 깊어진다. 나는 우연히 대구시인협회 주관으로 통영문학기행을 엄 시인과 함께 간 적이 있다. 그 때까지 「물방울 무덤들」이란 시는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 여름날 긴 소매를 걸친 것이 이상했지만, 선글라스에 중절모를 쓴, 아주 노래를 잘 부르는 멋진 중년 교수시인쯤으로 알았다. 청마문학관 대청마루에서 음료수와 떡을 권하다가 얼핏, 그 분의 손등과 양팔을 본 순간 나는 경악했다. 아니, 무참했다. 30년 신장 투석으로 인한 삶과 죽음에 매일 직면한 엄 시인의 처연한 삶을 그때 처음 목격했다. 링켈 주사바늘을 더 이상 찌를 곳이 없을 정도로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시는 지옥에서 나온 물건”이라고 말한 15세기 일본의 선승 잇큐의 하이쿠가 떠올랐다. 아무리 시인이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조차 없는 몹쓸 천명을 타고 났다 해도, 아픈 건 역시, 아픈 것이었다. 우주의 본질은 늘 현상 이면에 감춰져 있다. 시는 무의식에서 움터 불현듯 의식을 뚫고 꽃이 핀다. 엄원태의 「물방울 무덤들」을 읽는 순간, 트라우마야 말로 시의 보물창고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간당거리는 ‘물방울’의 비유적 이미지로 변용 수용된 ‘무덤’이란 시어는, 얼마나 슬픈 명구인가.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 맺혀 반짝이다가 /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라고, 1연에서 시적 화자는 연민의 눈길로 ‘물방울들’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글썽인다’란 이 표현이 나의 폐부를 찔렀다. 시인의 자기 고독이 ‘물방울들’ 속에 절실하게 감정이입되어 뭉클하다. 쪼그만 아그배의 밑동을 툭 차면, 수천 개의 물방울들이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 내릴 것만 같다고 독백한 화법은 애절하다. 2연의 ‘쟁강쟁강’의 의성어는 이승에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시인의 숙명 같아 긴 여운을 남긴다. 왜, 글썽거리는 것들 속에는 유리우주가 들었을까. 부스러지기 쉬운 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표명 장력처럼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는’ 화자의 애처로운 모습 앞에, 나는 침묵한다. 마치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 다리 위에서의 부르짖는 「절규」처럼, 죽음의 절벽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절박한 시인의 비명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물방울 무덤들」처럼 절제된 시는 섬광 같은 한 시구를 위해 시 행간의 팽창된 힘을 균형에 모아, 그 어떤 행간의 느슨함과 속임도 없이 본질을 향해 곧바로 일획을 찌른다. 삶은 어쩌면 그림자요, 죽음이 삶의 본질일지 모른다.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 너는, 하면서 /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 저 안에 이미 알알이 /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물방울 무덤’이란 제목도 서럽지만,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는’ 시인의 신산고초(辛酸苦楚)는 어쩐지 이승 밖의 노래처럼 들린다. 말은 끝났어도 뜻은 다함이 없어야 좋은 시듯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매일 매일의 급박한 삶은, 인간 삶이 고해(苦海)가 아니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다. 시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웅얼거림이요, 겨자씨마한 언어 속에 우주를 능히 집어넣을 수 있는 오묘한 이치가 담겼다. 병든 시인은 불행할지 모르나, 가장 슬픈 시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지만 아무나 명시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시가 ‘하늘에서 내리기’ 때문이다. 엄원태의 「물방울 무덤들」에서 보듯, 시인의 형벌 같은 삶의 궤적은 고스란히 시 행간에 화인(火印)처럼 찍혀 있다.
김동원 / 약력
1962년 경북 영덕군 남정면 구계항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 『문학세계』로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구멍』, 『처녀와 바다』, 『깍지』 출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태양 셰프』 출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시평론대담집 『저녁의 詩』 편저.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8년 대구문학상 수상. 대구시인협회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