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대기
류인서
어제의 벽에 등을 대고 서있다 오늘의 벽에 등을 대고 서있다
다중국적자처럼 우리는
달아나도 좋겠지 역주기로 오는 계절과
사수처럼 매달린 제3의 창문에게서
얼굴을 공유하는 화장술에게서
출구를 감추는 불빛들,
나는 무릎에서 흘러내린
기다림의 문턱값을 밟고 서있다
바람이 열어 보이는 틈바구니에서
마른 유칼리 나뭇잎의 고독한 살냄새가 난다
동쪽에서 꺾은 가지를 서쪽 창에서 피울 수 있을까
화분을 안은 여자의 아이가 손안경을 만들어 다른 곳을 볼 때
그림자들이 살아났다
밀도가 다른 두 공기덩이가 길 가운데서 만난다 전선이 통과한다
우리 몸에 시간이라는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을 것이다
류인서가 지금껏 추구해온 시 세계는 “유한의 육체와 무한의 시간에 살금살금 실금이 가게 하는 불화(不和)의 거울을 오래 응시”(송찬호)하기도 하며, “백 개의 눈 백 개의 혀를 가진 꽃”(장석주)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한편, 3시집『신호대기』는 사물에 달라붙어 있는 극도로 예민한 시어들을 상상력 하나만을 갖고 자유자재로 만진다. 그리하여 시인은, 사물과 풍경의 이쪽과 저쪽을 통과하는, 제3의 공간이란 독창적 심미안의 세계를 열었다. 즉, 그녀는「신호대기」를 통해 현실의 욕망과 세계의 비밀한 틈을, 시의 경계 지대로 설정한 셈이다.
생사의 경계는 어찌 보면 빨간 불과 푸른 불 사이의, 신호대기인지도 모른다. 하여 일상은 “어제의 벽에 등을 대고 서있다”가 “오늘의 벽에 등을 대고 서있”기도 한다. 반복되는 삶의 권태와 나태한 일상을 어떻게, 생의 긍정적 에너지로 승화 시킬지를 시인은 고뇌한다. “역주기로 오는 계절”을 통과해 “바람이 열어 보이는 틈바구니” 속에서 “고독한 살냄새”를 맡기도 하며, 자신만의 제3의 공간을 꿈꾸기도 한다.「신호대기」는 어찌 보면, ‘제 3의 공간’ 혹은 경계점에 서서, 시인이 추구해 가야할, 시의 효용 혹은, 심리적인 거리와 욕망의 카타르시스를 함께 융해시킨, 어느 지점인지도 모른다. 하여, ‘신호대기’는 우리 시대의 이분법적 사고를, 잠시 쉬면서 사유케 하는, 통섭의 숨구멍을 연상 시킨다. 그래서 시인은 “밀도가 다른 두 공기덩이가 길 가운데서 만”나 통과할 때, “우리 몸에 시간이라는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다고 역설한다. 이런 시적 사유의 밑바탕에는, 좌우 투쟁, 빈부 격차, 힘의 수직과 수평 관계와 같은 사회적 담론들이, 일방통행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시인의 깊은 암시가 투영되어 있다.
류인서의 독특한 시작(詩作) 방법은 세간에 정평하다. 시적 감각의 추상을 구체적 사유로 드러나게 한 점이다. 행간 속에 감정이 흘러넘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하여,「신호대기」는 드라이하다. 그런 것이 오히려 전혀 ‘낯선 방향’으로 시어들을 끌고 간다. 종잡을 수 없는 행과 행의 충동, 예기치 않은 시어의 돌발 출현, 연과 연의 무방향성, 이런 모호한 시적 상황이 시의 의식을 명료하게 한다. 시인은 이런 무의식적 상태를 ‘풍경 인식’이라고 부른 바 있다. 그러니까 풍경을 있는 그대로의 것들로 보지 않고, 시인의 경험, 살아가는 방식들의 틈에 밀어 넣어, 내면의 상상력과 버무려, 시가 튀어나오게 하는 방식이다. 즉, 설명적 이미지가 아니라, 생략과 압축적 이미지로 추상화 한다.「신호대기」는 알고 보면, 사회의 음습한 틈을 통해, 더 밝은 세상을 훔쳐본 시의 비밀한 세계이다.
김동원 / 약력
1962년 경북 영덕군 남정면 구계항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 『문학세계』로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구멍』, 『처녀와 바다』, 『깍지』 출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태양 셰프』 출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시평론대담집 『저녁의 詩』 편저.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8년 대구문학상 수상. 대구시인협회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