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경매에 내놓으려 하는 오래된 꽃병이 있어요
꺾은 꽃가지에서 비린내가 나지 않으면 이제 그런 건 거들떠보지도 않네요
그러니 누가 저 꽃병목에 방울을 달겠어요?
쉬잇, 지금은 고양이 철학 시간이에요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모서리 구멍을 응시하고 있네요
아마 지금은 사라져버린 사냥 시대를 생각하고 있겠지요
우리는 모두 어둠과 추위로부터 쫓겨온 무리랍니다
한때는 방 안을 뒹굴던 털실 몽상가와 잘도 놀았답니다
현기증 나는 속도의 바퀴와 아찔한 연애도 해봤구요
네발 달린 의자에 사뿐히 뛰어 올라 털실이 떠나간
털실 바구니에 들어가 때때로 달콤한 오수를 즐기지요
앗,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방 안 모서리, 손거울, 집 열쇠, 어항의 물고기가 사라지고 없어요
다그쳐 물어도 종알종알 털만 핥을 뿐 모른다 도리질만 하네요
쫑긋 귀 동그란 눈동자……, 그토록 짧은 혀로 그것들 모두 어디다 숨겼을까요
옛날 일본의 닌자들은 고양이 눈동자의 열림 상태를 보고 시간을 예측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 민가에서는 아직도 ‘고양이 눈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고양이 눈은 새벽 무렵과 해질녘에 동공이 크게 열려 둥글게 보인다. 오전 8시와 오후 4시 경에는 달걀 모양 정도로 가늘어 진다. 오전 10시와 오후 2시 경에는 달걀 모양에서 점점 더 가늘어지고, 정오 무렵엔 아주 가늘어져, 고양이 눈이 바늘처럼 일직선으로 보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양이는 일찍부터 수많은 시인, 소설가, 화가들의 작품 속에 조연 또는 주연으로 등장했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소설가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은, 일본 근대 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끼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직접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유명하다. 소세끼는 이 작품을 통해 근대 일본 지식인 사회의 모순을 풍자해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여성을 고양이로 비유한 보들레르의 관능적 고양이가 있다면, 불안과 공포,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포우의 고양이는 악마를 닮았다.
한국 현대시사 가운데 고양이를 주제로 한 유명한 시는, 나쓰메에게 영향을 받은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를 들 수 있다. 한 세기가 지났건만 여전히 감각적이고 참신한 표현으로 사랑받고 있다.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과 “봄의 생기”는 고월(古月)만의 독특한 시선과 재기가 아닐 수 없다. 송찬호의 「고양이」 또한 백미이다. 그의 시 「고양이」는 고양이를 통해 물질문명에 잃어버린 인간 정신의 가치를 회복시키고자 쓴 철학적 동화시이다. 이 시는 시집『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2009, 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되어 동물시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쉬잇, 지금은 고양이 철학 시간이에요 앞발을 /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모서리 구멍을 응시하고 있네요 / 아마 지금은 사라져버린 사냥 시대를 생각하고 있겠지요 / 우리는 모두 어둠과 추위로부터 쫓겨온 무리랍니다》
시인은 어떻게 고양이가 철학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참 신기하다. 송찬호의 시집『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전체가 신화적, 동화적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준다. 인간과 가까운 ‘고양이’를 등장시켜 조곤조곤 옛 이야기를 은유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은, 이 시인만의 독특한 화법이다. 마치, 인간의 소중한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을 ‘고양이’를 통해 찾아낸 듯한 은밀한 독백은, 이 시대 어른들의 탁한 영혼을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신범순은 ‘고양이’를 문명에 길들어진 인간의 또 다른 비유로 해석한다. 태초의 야성을 잃어버린 물질문명에 찌들린 인간들의 허약함을, 야생을 잃어버린 집고양이의 길들여짐과 한 궤로 본 것이다.
《앗,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방 안 모서리, 손거울, 집 열쇠, 어항의 물고기가 사라지고 없어요 / 다그쳐 물어도 종알종알 털만 핥을 뿐 모른다 도리질만 하네요》
이 시행이야말로, 고양이의 생태를 실감나게 표현한 것 같다. 송찬호는 고양이라는 놈을 은유해 현대사회를 비판하는가 하면, 제멋대로인 고양이의 생태를 동화적 발상 속에 녹여 낸다. 틈만 나면 방안 물건을 눈 깜박할 사이에 물고 어디로 사라지고 마는 고양이의 장난을, 시인은 밉지 않게 본다. 왜냐 하면, 고양이야말로, 인간 생태의 철학적 문제로까지 시적 외연을 확장시켜주는 중요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송찬호의 시세계는 자신의 삶 주변에서부터 동화를 재발견하려 한다. 이미 유형화된 상업적 동화나 문명의 입구에서 안내자 역할을 맡은 그러한 동화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동화로 이 시대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조근조근 풀어낸다. 1959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난 시인은 경북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한국 서정시의 가장 주목받는 시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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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사진)
약력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2시집『구멍』, 3시집『처녀와 바다』, 4시집『깍지』출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태양 셰프』출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시평론대담집『저녁의 詩』편저.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당선.
현재 대구시인협회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한국시인협회원.『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