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은 어찌 보면 참 많은 것을 가졌다.―저 광활한 우주의 별들이 생겨나고 또 죽어서 스스로 돌아가는 몰락과 생성의 두 구멍이 있는가 하면, 우리 같은 수컷들이 알이나 새끼로 자라서 흘러나오는 저 한정 없는 암컷들의 한없이 깊고 넓고 편안한, 그 한 길 구멍도 있다.
좁게는 부끄러운 짓거리를 했거나 크게는 온 나라를 망쳐서 말아 먹은 자들이 으레히 숨어서 들락거리는 쥐구멍 같은 것도 있고, 참 착한 것들이 두 귀를 쫑긋거리고 봄나들이 길을 나서는 그 아늑한 수풀가의 토끼 구멍도 있다.
구멍은 또, 여름 밤 도시 옆구리 길의 복개천 아래로 몰래 쏟아 놓은 퀴퀴한 인간들이 썩는 오물냄새 나는 수챗구멍에도 있고, 꽝꽝 얼어붙은 겨울 연못가 도랑 밑에 흐르는, 졸졸졸 소리 나는 맑은 봄기운을 흡입하는 그 생기 도는 버들 뿌리의 작은 공기 구멍에도 있다.
구멍은 어찌 보면 참 많은 것을 가졌다.―이따금 난 산이 몸부림치는 이상한 소리를 바람 부는 뒷산의 동굴 구멍 안쪽 벽에서 들었는데, 어찌 들으면 그 소리는 태초의 첫 구멍 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또또 어찌 들으면 많이 쓴 구멍들의 흥건한 절정의 끄트머리에서 흘러나오는 그 야릇한 소리로, 수만 년 제대로 키워 온 자연의 그 순리 구멍의 신음쯤으로 알아들었다.
어쩌면 좋은가. 이 하늘과 땅의 그 많은 구멍 중에서 우리는 어떤 구멍을 가져야 하는가. 오뉴월 개도 걸리지 않는 삐삐거리는 콧물소리 내는 콧구멍이 되든가, 아니면, 달빛이 걸어가는 대숲 속에서 은은히 흘러 소리 되어 나오는 그 멋진 대금의 피리 구멍 가락이 되든가, 아니면 또, 저 동해 바다 한가운데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는 그 고래들의 마구마구 뿜어 올리는 무한 자유의 숨구멍이라도 되든가.
참으로 그 구멍이 하는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그 무슨 질퍽거리는 운명의 진흙 구멍 속에라도 들어가야만 하고, 또 그 구멍 밖으로 안간힘을 다해 기어 나와야만 한다. 마치, 저 백두산 천지 복판에서 날마다 힘차게 밀고 올라오는 그 생수 구멍의 당찬 힘처럼, 우리도 언젠가 한 번은 찬란한 기쁨의 인생을 위해, 온몸으로 어둠의 구멍을 뚫고 나가야만 한다.
「구멍」은 제2시집『구멍』(2002, 그루) 속의 표제시이다.「구멍」을 쓸 무렵 나는 엘리베이트에 낀 사고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경련과 창자가 꼬여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두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소용이 없어, 밤낮없이 온갖 귀신 소리 같은 것이 들러붙어 죽음보다 못한 지경까지 갔다. 신경정신치료를 병행했지만 우울증만 더 심해져, 나는 그 괴로움을 이겨낼 방법으로 수성 못 뒷산인 법이산을 5년 간 산책했다.
한밤중 물 속 바위에 끼여 살려고 발버둥 치다 나도 모르게 짐승처럼 고함을 내질렀던 가위눌림은, 극심한 공황장애로 이어졌다. 걷기만 해도 온통 사방 공기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한동안 환청과 환시에 시달려야만 했다. 극도로 숨이 딸리면 내 몸과 사물이 서로 하나의 리듬(율려)으로 이루어져있다는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다. 숲속을 오르내리며 들숨 날숨이 힘겨울 때마다, 나는 이 우주 만물이 죽어서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그 ‘구멍’ 밖으로 새 몸이 되어 태어나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불현듯 그런 시각으로 세계를 보니, 모든 구멍이 빨려드는 리듬과 흘러나오는 리듬으로 보였다. 우주 별들의 “생성과 몰락”인 블랙홀과 화이트홀의 구멍, 암수의 구멍, 쥐구멍, 토끼 구멍, 콧구멍, 공기구멍, 고래의 숨구멍, 대금 구멍 등등 삼라만상이 구멍의 리듬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랬다. 구멍은 어찌 보면 우주 음양이 드나드는 통로이자, 율려란 이름의 생체 리듬의 다른 이름일지 몰랐다.
어린 날 뒷산의 동굴 구멍 안쪽 벽에서 들었던 그 야릇한 소리는, 수만 년 제대로 키워 온 산의 달뜬 신음 소리이자 음악이었다. 이렇듯 시「구멍」은 한 시인이 죽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용케 그 구멍 밖으로 살아나온 체험을 율려의 시각으로 바라 본 시이다.
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