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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환 작가- 대구출생 .대구성광고 졸업 .경북대 독문과 졸업 <주요저서>마음 중 단편 .대불(시집) .김대중 .한국전쟁 언저리 .금호강의 영혼(시집)
#매주 목요일 연재
지하세계 1
10. 28계단을 지나 36계단에
28계단에는 노랑하늘이 드리워져 있다. 진한 진노랑하늘에는 밤이 아닌 낮인데 별들이 빛나고 있다. 반짝이는 일곱 별들이 원을 이루어 땅으로 비추이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방인으로 이곳에 들어선 그로서는 반복되는 고통에 체념된 지경이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세블국에 돌아가 살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건강한 몸을 간수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각오와 마음은 변하진 않아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오는 지금에 언샘밭으로의 발걸음은 되돌릴 방법이 마땅치 않다. 방어하는데 까지 방어를 하고 도저히 능력을 넘어서면 그런 상황을 견뎌내고 당하는 대로 살아나더라도 차후에 확실한 대비책을 세울 수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진노랑 하늘이 무엇인지, 어떻게 바뀐 세상인지 맞닥뜨려 봐야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 어귀에는 연보라색 오동나무 꽃잎이 갈색의 오동열매위에 가지런히 매달려 있다. 널찍한 잎들은 싱싱한 줄기에 오밀조밀 붙어 있지 않고 듬성듬성 진노랑 하늘이 보이게끔 붙어 있는데 매끄러운 둥치의 표면이 선명하다. 길가로는 땅바닥에 나지막이 깔린 보라색의 하늘거리는 패랭이꽃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어떤 나무는 흰빛깔이 섞인 연보라 오동꽃잎이 많이 붙어 있고 약간 멀리 있는 나무는 연보라 꽃들이 지고 갈색의 열매들이 조롱조롱 탐스런 모습을 하늘에 자랑하고 있다. 거문고 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쪽으로는 향긋한 향이 사르르 불태워지고 있다. 여덟 가지 색의 연꽃등을 만들어 줄줄이 매달아 놓았다. 칠백 칠십 칠 계단에는 계단마다 예쁘장하게 웃음을 머금은 아리따운 처녀들이 한 사람씩 서 있고 옆에는 씩씩한 청년들이 우람한 몸매를 보인다. 777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중 아주 늙은이와 아주 어린이는 힘이 드는지 숫자가 적고 젊은 청장년이 대부분이다. 77계단을 올라서니 목탁소리가 들리고 177계단을 올라서니 맑은 공기가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277계단을 올라서니 약간 사악한 마음이 줄어드는 듯하다. 377계단은 그로 하여금 오장육부가 시원케 한다. 477계단에서 휘둘러본 풍경은 아담하고 살포시 안겨오는 표정이다. 577계단은 잃어버린 희망의 빛줄기를 붙잡아 매게 한다. 677계단은 방실방실 웃음 짓는 아가들이 모두 모여 즐겁게 놀고 있다. 777계단에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착한 일들이 있을 것이고 그런 일을 하면서 살면 큰 환란은 면할 것이라는 즐거운 기운이 나오는 곳이다. 꼭대기에서 바라본 세상은 근심걱정으로 찌든 그에게 심신의 고통을 감해준다. 무위자연에 합일하여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사라지면 그만이다. 명리합소대시설(名利合小大詩說)을 외치던, 모삼일태팔명마남북(母三一太八名마南北)이던, 삼성삼절주의(三成三絶主義)가 희망의 불빛이던 그에게 남겨진 것은 모두 공으로 돌리면 허한 마음이 남겠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현실이다. 죽는다고 무엇이 달라지나 자연 속에 잠기고 묻힐 뿐이다. 그는 777계단을 기억하지만 777명의 이름도 금방 생각나지 않는다. 36계단으로 들어선 발걸음에 호된 시련과 고난으로 이겨왔다 해도 다시금 잘못을 반복한다면 곤란하다. 미물인 인간이지만 생각하는 힘으로 버텨온 긴 세월이었다. 올바름과 아름다움이 정직하게 세워진다면 꼭 마귀들만이 사는 세상은 아니다. 덜 사악하고, 덜 나쁜 일을 하고, 덜 사나워질 때 오동나무 숲도 우거지고 파릇파릇 보드라운 잔디밭도 늘어나고 깨끗한 심성으로 자라는 어린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이다. 염세적, 비관적 종말론보다는 아무래도 희망적이며, 살아갈 수 있는 세블국이며, 인간세상이길 바라는 마음들이 누구든 조금씩은 있다. 없다면 새로이 깨우치게 하여 살기 좋은 땅이 되어 보자! 아무리 나쁘더라도 좀 좋은 것을 발견하여 더 나쁘지 않도록 서로서로 노력하는 평범하고 당연한 세상이 그렇게 어렵겠는가? 인간이 생존하면서 결과적으로 옳은 쪽에 서온 사람이 많았기에 이제껏 유지되어 왔으므로 당연한 일들이 더 당연한 곳이 되게끔 해보자. 고기를 잡는 어부일지언정 사람을 만들고 배우는 쪽으로 정말로 힘든 걸음을 걸어보자. 쉽지 않은 출발이지만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자. 본래의 사람이 되자. 이왕이면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원수진 일이 없는 곳이면 월등히 나은 것이다. 서로 아끼는 일 외엔 다른 일은 하지 말자. 서로 싸우는 일은 다른 세상에서나 열심히 하더라도 끝까지 사람이 짐승으로 뒤바뀌기길 거부하는 운동을 계속하자.
29계단에는 검서 땅이 훤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서 만난 사람은 늘씬한 키에 총기 있는 눈매를 지닌 건강한 사람이다. 참외와 수박농사를 많이 짓는 검서 땅의 가양산 기슭의 해우사 동네에서 태어나 훌륭한 인재로 성장했다. 학생시절부터 뜻을 둔 곳에 지극 정성을 쏟아 많은 지방민들로부터 능력과 인격을 인정받아 검서 땅을 통치하고 있다. 세 명의 왕자와 네 명의 공주가 태어났다. 금화 영주는 다섯 해 전에 큰 흉년으로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받았으나 부화뇌동하지 않고 끈기 있게 참아낸 사람들로 인하여 위험한 고비를 슬기롭게 넘기고 풍요롭고 평화스런 나라를 유지하고 있다. 기름진 땅으로 열심히 일구었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바뀐 나라이다. 그는 금화 영주를 만나 동등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세블국의 지위를 회복한 셈이다. 세블국의 어려움을 나열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만다. 검서 땅의 유래는 만군력 5,000년 전에 말을 타는 선조들이 긴 나날을 이동하여 맑은 물, 풍부한 풀, 따뜻한 기온으로 살기에 적합한 이곳에 정착을 함으로써 마을이 생기고 인구가 불어나면서 시작했다고 한다. 거북이 등껍질이나 파피루스에 상형문자를 새겨 넣음으로 옛일들을 소상히 알 수 있으며 뛰어난 학자들이 옛 유물들을 해석하고 잘 보존하고 있으므로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는 세블국의 역사는 너무도 짧으며 여왕의 왕명으로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만들어낸 나라임을 알려준다. 풍부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의식주의 획득을 위해 고통 받는 일은 드물며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노력을 기울인다고 답변한다. 그러자 금화 영주는 의식주 해결에 무슨 비법을 이용하는지 가르쳐 주시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살 수 있으므로 도와달라고 한다. 그로서는 너무 좋다고 안 하려다가 결국은 말꼬리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상황을 바꾸기 위해 또 몇 마디가 덧붙여진다. 사실인즉, 형편이 너무 힘든 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갑자기 세블국으로 몰려오기도 하고, 그럴 형편이어서 몹시 복잡하고 어려운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운을 뗀다. 금화 영주도 그 점은 자기도 이해할 수 있는데 근처의 백성들이 한꺼번에 자신의 땅으로 이주해오는 때문에 속도를 늦추는 이민법이 시행되고 있음을 시인한다. 금화 영주는 수박, 참외농사가 열대지방에서처럼 자연물을 아무나 채집만 하는 것도 아니고 고온의 비닐하우스를 사용하는데 따라 농사의 힘든 점도 많다고 알려준다. 개량된 비닐하우스로 농사일을 할 때 쾌적한 상태가 되는 방법을 연구 중인데 신통치 않아 세블국의 앞선 기술을 견학할 기회를 달라고 한다. 그는 무조건 안 된다고 할 수 없어서 제한된 범위에서 상호 농업연구가의 인적, 학문적 교류를 인정하게 된다. 그도 부탁의 말을 한다. 이제껏 심신이 무척 괴로운 일이 있었으므로 이곳에서는 심신이 안정된 상태로 지내다가 상황에 따라 다른 곳으로 옮기더라도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한다. 두 사람은 흔쾌히 상호인정을 통하여 질 좋은 나라로, 멋있고 살기 좋은 곳으로 되게끔 돕는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제2지하국가의 송쇄리통조림보다 더 깨끗하고 맛있는 피라미 요리가 나온다. 맑은 시냇물에서 잡은 것인데 희면서 등 푸른 빛깔이 햇볕으로 인해 일곱 가지 색으로 반짝거린다. 이에 씹히는 잔잔한 속뼈는 맛을 한층 돋운다. 세블국의 위치와 도착 방법 등을 설명하여 주자 금화 영주는 적이 놀란다. 그들의 정보입수자료에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심정으로 기쁨에 들떠 있는 금화 영주와 측근들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이들을 실망시켜서는 곤란한 점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금화 영주는 그를 장미초원으로 인도한다. 빨강, 흰색, 초록 온갖 장미꽃으로 우거진 곳인데 만져보아도 괜찮다고 하면서 이 꽃들은 가시가 없는 개량종이란 것이다. 꽃잎들을 따가지고 수박, 참외처럼 식용이 가능하다. 장미꽃들은 아이스크림이나 과일처럼 보드랍고 감칠맛이 난다. 금방 따먹은 자리에서 또 아름다운 꽃이 핀다. 이 장미꽃의 특징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많이 따먹어도 그 꽃이 줄지 않으며, 계속 다시 나므로 그 맛이 미각, 후각에 싫증이 안 나는 것이라 한다. 많은 나라에서 이 꽃을 옮겨주기를 원해서 나누어 주었는데 토양과 기후조건이 달라 살지를 못했다고 한다. 토양도 옮겨갔지만 새로운 토양을 거대한 규모로 만들지 못해 실패를 한다고 한다. 기후조건의 변화도 성공이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한다. 그로서도 애래우캐래야 숲이나 언샘밭을 자랑하려다가 또 달라고 할까봐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미꽃 씨앗과 토양을 좀 얻어가자고 하기에 이른다. 실패는 하더라도 시도는 해보아야지 하는 심정이다. 아쉬움을 남기고 다음의 땅으로 간다.
30계단에는 선편 땅이 펼쳐져 있고 탄탄한 몸매와 굵은 두 눈을 지니고 운동을 즐기는 전수 영주이다. 이 나라는 오랜 외침으로 시달리어 잘 발달된 기술이 낯선 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일이다. 안전장치가 만들어져 있는 입국비행장에는 그에 대한 자료가 보안요원들에게 이미 알려진 상태였다. 그를 맞이한 전수 영주는 그래도 확인 안 된 부분에 대하여 그에게 답을 요구한다. 세블국이 어디에 있으며 그의 위치는 무엇인가란 질문이다. 위치설명을 해주자 좀 석연치 않다는 투이며 총독의 남편이라고 하자 너무나 초라한 행색에 같이 다니는 비서도 없는지 의아해 한다. 처음 오는 외부인을 마음 편하게 안심시키는 음악과 음식이 제공된다. 놀랍게도 세블국에서 듣던 노래며 거의 비슷한 음식이다. 그렇게 빨리 알아냈을까? 의심도 들지만 부드럽고 포근한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그를 세블국에 되돌아온 듯하게 해준다. 그의 몸 상태를 점검하고는 쇠약한 기초체력을 보강하기 위한 운동계획표를 제시해주고는 넓은 운동장으로 그를 데리고 간다. 차근차근 골병이 든 육신을 치료해준다. 처음에는 아픈 듯도 하였으나 점점 온몸에 기가 제대로 돌아가니 시원시원해진다. 몸속의 노폐물을 제거시키고 온통 스며든 독기를 뽑아버린다. 27계단의 금화 영주에게서 심리적 안정을 받았는데 이곳에서 몸까지 정상으로 되돌아오므로 기력과 정신이 좋아진다. 산소공급을 많이 받아야하는 우주비행사들이 운동하는 에어로빅을 차근차근 가르쳐주고 심장기능이 강화되는 법을 교육해준다. 갑자기 놀라거나 숨이 멎을 때 대처하는 신체위기상황에 대한 적응훈련을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르쳐주고 혼자 못할 때는 상대방이나 낮선 사람의 도움을 실수 없이 이끌어내는 방법도 가르쳐 준다. 진작 알았으면 이처럼 덜 골병이 들었겠지만 이제라도 응급 시에 대처할 지식과 행동유형을 체득하게 된다. 인간에게 극한상황으로 몰아가는 일주일이상 잠 안 자는 것, 30일 이상 굶주리는 일, 잔인한 고문에서 탈출하거나 탈출은 못해도 견뎌내는 교육도 받게 된다. 몹시 힘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수반되는 부분은 완전한 건강회복 후에 집중적인 대책을 세우기로 한다. 복식호흡도 아울러 알게 되고 호흡을 늘이고 조절하는 기초실력도 배양된다. 그는 매우 감사하여 무슨 답례를 약속해야 할 심정이 된다. 꼭 지키겠다는 단서는 달지 못한 채 전수 영주가 세블국을 방문해 주던지, 훌륭한 방위전문가들이 세블국의 군관계자들을 교육시켜 줄 것을 요청한다. 전수 영주는 반대의 표시를 하지 않고 적극적 태도를 취한다. 초라한 행색의 그를 세블국의 실권자로 대우해준다. 대화 도중에 새겨들을 만한 내용은 선편 나라가 누구든지 지키고, 가꾸고 싶어 하는 나라가 되도록 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최고의 노력과 희생을 쏟아 붓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 사례를 직접 대하진 못했지만 스스로를 방어하는 지혜까지 전달해 주는데 고맙게 생각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모택동의 게릴라군은 2만 5천리의 대장정 동안에 패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고생을 시키지도 않았다.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 부어 결과적으로는 2만 5천리나 되는 도망가는 길에 지지자들이 불어나는 땅으로 변화시켰다. 총 3백 68일 동안에 하루 평균 38.5km를 행군하여 총 거리는 만리장성(6천 km)의 2배에 달했다. 거친 성이 11개였으며, 넘은 산맥이 18개, 그중 5개는 눈이 덮인 고산령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착한 병력은 3만이었다. 이 속에는 일곱 명의 여성간부가 있었다. 그중 주은래의 부인인 등영초(鄧穎超)가 있었다. 전수 영주는 아주 소상하게 가장 사람이 많은 나라를 통일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진심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는 여러모로 생각해 보아도 민심을 얻은 것이란 생각에 잠기었다. 3만의 병력이 엄청난 중국을 통일하는 밑거름의 시작이었다. 그는 전수 영주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는 분도 땅으로 간다.
31계단의 분도 땅은 방대 영주가 자비스러움으로 다스리고 있다. 선조들의 무덤과 유물이 가장 많이 오래도록 보존된 땅이다. 간혹 발굴을 해보면 원형대로 보존된 경우도 많지만, 부장품 중에서 금으로 된 물건만 도굴한 경우도 있다. 무덤들의 형태는 둥그런 원형에 흙으로 쌓아올린 것들인데 무덤 속의 내용물을 비교해보면 약간씩 문명이 변화하여 왔음이 증명된다. 세월이 덜 오랠수록 무덤 축조기술이나 부장품이 우수한 것이 많아진다. 고대일수록 무덤에서 발굴되는 사람의 뼈가 여럿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정도의 뼈만 발굴된다. 순장제도가 사라지는 증거이다. 이 땅의 사람들은 희생정신과 봉사심이 강하여 어려울 때나 죽음이 요구되는 상황전개에서 순장제도는 아니지만 한날한시에 같이 죽을 각오가 단단한 나라사람들이다. 웬만한 어려움들이 닥쳐와도 굳세게 막아내고 살아간다. 농사철을 대비하여 저수지와 못을 튼튼하게 만들거나 다듬고 홍수 때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합심노력 한다. 재난이 닥치면 서로 다투거나 책임을 떠넘기기보다 솔선수범하는 자세들이 역력하다. 꾸준히 자신들의 분야에서 열심히 정성을 쏟아 일들을 한다. 부정부패나 남을 속이는 일이 발생치 않으므로 신뢰의 폭이 넓어져 물자의 생산이나 경제적 부흥도 엄청나다. 식민지국가로 살던 나라의 국민들은 독립이 되자 수확한 농산물을 빼앗기지 않고 제 스스로 처분하여 소득으로 가지게 되자 시키지 않아도 더 부지런히 일들을 했다. 중요한 나라의 일에 참여조차 할 수 없던 식민지백성들이 독립된 나라에서 제 스스로 기회를 가져봄으로써 더욱 발전시키고 가꾸어가려는 자신의 나라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이 분도 땅은 스스로가 발전과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과거 공산국가들이 집단농장에서는 생산량이 형편없었지만 사유로 허락된 텃밭에서 생산해내는 농산물이 오히려 수확량과 결실의 정도가 월등히 높았고 사유경제체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었다. 방대 영주가 경영하는 이 나라는 활기에 찬 땅이며 믿음이 지배하고 자비로 인해 다툼도 훨씬 적다. 나라에서 너무 강압적으로 개인재산을 빼앗아 가지도 않으므로 이들이 근로의욕을 상실하거나, 창의성개발에 비협조적이거나, 반대하지를 않는다. 꿀벌이 꽃을 탐하듯 사람들은 믿음을 탐내는 곳이다. 착실한 마음을 즐겨 찾아다닌다. 서로가 화목하게 지내므로 도타운 사랑의 기운이 쏟아나고 살고 싶은 땅이 된다. 반목과 질시, 파괴와 무질서, 싸움과 편 가르기, 이런 현상들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무덤 속의 주인공들은 사회의 갈등요인들을 통합의 편으로 되돌리려 노력했던 사건들에서 공을 쏟아 부은 사람들이 많다. 두 사람이 모이면 시작되는 공통분모의 산출에서 그 통합의 실행들이 자연화 되도록 기술적, 정신적 주춧돌을 쌓아올렸다. 지어진 유적들은 이천 년, 삼천 년이 지나도 파괴되거나 훼손되지도 않고 잘못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방대 영주의 자비로움이 커짐에 비례하여 만들어지고, 채워지는, 건축물이나 문화재의 섬세함, 아름다움, 정교성, 예술성, 역사적 가치, 미래에 보존되는 힘 등이 나아졌다. 상호선린의 정신은 가까운 나라들도 좋아하였고 특히 스스로 하게끔 하는 정신적 토양을 배우기 위해 많은 타국의 사람들이 찾아든다. 그들은 더 나은 조건이나, 똑같은 상태에서 시작하였건만, 한 세대에 못 미쳐 발전의 폭이나, 성공의 영역이 너무도 차이가 나자 무엇인가 다른 점들을 본받고자 정성을 쏟는다. 자비로운 믿음에 노력을 하는 것인데 상호간에 진실한 정신이 합일하여 나오는 인간의 힘이다. 올바름으로 몰아갈 때 올바름의 등불은 켜지게 되고 올바름으로 인해 만사는 무리하지 않게 차곡차곡 제 길을 찾아간다. 분도 땅에서 솟아나 퍼지는 이 기운은 어느 누구도 싫어하거나 거부할 성질이 아니다. 좀 더 가꾸고 다듬을수록 밝고 명랑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가 쉽다. 너무도 당연한 일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되거나 정당화의 길이 힘들고 합법성과 정향성의 기질이 침해받는 토양이 된다면 그 나라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발전을 주저앉게 만드는 과오를 범한다. 방대 영주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높은 도덕성, 진실성, 창조적 노력을 통해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는 행복하고, 아담하며, 슬기로운 조국을 건설하여 멋있게 살아가고 있다.
32계단의 편고 땅에는 종순 영주가 나라사람들과 더불어 맛있는 과일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비바람이 불 때 과일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과 벌레에 파 먹히지 않게 하여야 한다. 기상예측에 따라 기상변화는 알 수 있지만 ‘마루 넘은 수레 내려가는 동안’에 커다란 과일나무와 넓은 과수원을 변화시켜야 한다. ‘병자년 까마귀 빈 뒷간 들여다보듯’ 연구원은 노력을 했지만 결실이 나오진 않는다. 히틀러가 네덜란드를 침략하여 굶주린 네덜란드 국민들이 튤립 구근을 먹으면서 죽음을 면했는데 지금은 그 꽃으로 선진국대열에 끼여 있다. 종순 영주는 이런 저런 여건에서 마늘이나 양파가 소비자나 생산자에게 천대를 받지만 튤립 구근 역할도 하고 낮은 수익이나마 건져내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 과수원 밑바닥은 토양의 기름기를 마늘이나 양파가 빼앗아 가긴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사인 만큼 소홀히 하기보단 신경이 쓰인다. 비바람을 막을 방풍림은 더 넓은 지역을 기준으로 거국적으로 계획을 잡아야 한다. 산맥이 가로막아 지형상 내리는 비바람에도 가장 비바람이 센 쪽으로 산맥전체 길이에 이르는 방풍림이 서야한다. 사시사철 잎이 떨어지지 않고 비바람에 휘뚝휘뚝 하더라도 부러지지 않고 긴 세월동안 살아남을 종자를 심어야 한다. 일의 순서가 원점으로 되돌아가 과수묘목보다 우선적으로 방풍림을 심어서 해안선과 산맥에 심기 시작했다. 잘 만들어진 숲과 과일밭을 둘러본 그로서는 감탄이 터졌지만 세블국이나 지상국가의 제방 둑보다는 훨씬 못한 것들이다. 상대방이 심혈을 기울여 이루어 낸 일들이므로 사람인 이상 칭찬을 해야 했고 과소평가를 해서도 안 된다. 이들이 세블국에 와보면 이민을 오던지, 되돌아가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편고 땅도 살기가 무척 좋은 곳이긴 해도 상대적으로 더 나은 곳을 보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다. 방풍림 지역을 약간 벗어나면 빗물을 엄청나게 빨아먹는 수풀이 우거져 있다. 나무만큼이나 크게 자라고 밀도가 너무도 빽빽하여 기계를 이용해 베어내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를 못한다. 그런 엄청난 양의 풀을 일 년에 네 번씩 베어내어도 방풍림만큼 큰 높이로 자라난다. 이 풀들은 식용, 약용, 퇴비의 여러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 이 퇴비를 과수원에 뿌려서 과수의 발육이 월등하다. 떨어지는 과일은 마늘과 양파의 줄기에서 나오는 진액과 농업연구소에서 발견한 살포물질로써 껍질을 미세표피막으로 덮으므로 썩는 과일도 없다. 편고 땅의 사람들은 식량걱정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과일도 많고 식용풀은 남아돈다. 풀밭이 파괴되거나, 과수원이 없어지거나, 방풍림이 불타버리거나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모든 법률과 계획들이 세워진 곳이다. 시행되는 기술수준을 볼 때 애래우캐리야 숲과 언샘밭의 경작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 안타까운 심정이지만 선뜻 그는 모든 기술을 공짜로 가르쳐 주겠노라고 말을 못한다. 많은 것 중에서 침수에 대비하여 제방둑 축조기술도 가르쳐야 할 곳이다. 종순 영주는 보잘 것 없는 그를 면밀하고 친절하게 대우하는데 통상적인 일들일 것이다 싶으면서도 이러저러한 것들을 알아차리고 협조를 요청할 때 그것에 대한 궁색한 답변이나 어느 정도까지 협력의 도를 펼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100%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땅은 언샘밭으로 바꾸는 일과 과일나무 숲으로 도시까지는 못되어도 작은 마을을 만드는 방법, 아라비행선의 사용 등은 얼마든지 이전 가능한 기술수준들이다. 그는 36계단까지의 만날 사람들이 누구인지 몰라도 그들의 요구조건에 한 가지씩만 나누어 가르쳐 주겠다고 하여도 다섯 가지의 기본적 협상목록과 노하우를 준비하여야 하고 몽땅 한 곳에 보따리를 다 풀 수 없는 한계성에 직면한다. 그도 사람이고 대자대비의 부처님이나 절대선을 행하는 인류구원의 큰 인물은 못된다고 보아야 한다. 조그만 떡덩이로써 생색을 내야하는 세블국의 존재이다. 아니나 다를까 종순 영주는 그에게 외교적 협조요청을 한다. 여러 가지 떡 중에서 그는 사과밭, 복숭아밭 등의 과일밭의 밑바닥을 언샘밭으로 개량하는데 약간의 보탬을 하겠노라고 언급한다. 그들은 양파와 마늘을 생산하고는 있지만 완전히 믿지는 않아도, 안 믿는 것도 아닌 외교적 합의를 한다. 종순 영주는 그의 앞길을 축복해 주면서 두 사람은 아쉬운 작별을 한다.
이제 그는 검우 영주가 다스리는 33계단의 고소 땅에 온다. 이곳에는 상호간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기술이 발달해 있다. 사실, 진정한 대화란 감정이입이 필요하다. 먼저 자기 입장을 떠나 타자와 자신을 볼 줄 알 때 감정의 교류가 생긴다. 자기를 신성시하고 자신의 입장을 물러서지 않으면 대화가 실패할 수도 있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미숙하고 부족한 사람일수록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다. 어린아이가 유치한 것은 자기 입장대로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이 객관화의 능력을 갖춘다는 뜻이기도 하다. 검우 영주는 곧바로 그를 면담하지 않고 비서진의 충고들을 몽땅 듣고 난 뒤에 그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벌써 두 사람 사이에는 상대방을 살펴보고 있는 현실이 섞였다. 검우 영주는 상대방이 혈혈단신임을 생각하여 배석자들을 물리고 일대일의 대화 상태를 만든다. 언어소통이 안 되어 통역관은 어쩔 수 없다. 검우 영주가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 그가 입을 떼자 통역관은 이제껏 만나보지 못한 언어인지 검우 영주에게 소곤소곤거리자 두 사람의 낯선 사람이 들어온다. 그가 또 말을 하자 두 사람도 잘 알아듣지 못하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제1지하국가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는 많이 잊어버렸지만 제1지하국가의 언어를 기억을 더듬어 갈수록 유창해지는데 그 언어를 사용하니 그 사람은 잘 알아듣는다. 통역관은 그제야 제1지하국가에서 새로 생긴 세블국의 국민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이들은 그가 세블국에서 온 사람임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까지 온 과정 중 세블국에서 이해하기 힘든 괴상한 땅을 거쳤다고 말하자 믿지 못하는 표정들이다. 어차피 대화는 상대방을 100% 알고서 하는 것은 아니다. 제1지하국가의 참상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 세블국에도 그에 따른 문제점이 생기지 않았는가를 묻는다. 그럴 형편이 될랑 말랑 할 순간에 자신은 이리저리 유랑하는 신세가 됐다고 대답한다. 그들이 안내하는 곳에는 정보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세블국에서 보고서로 접한 대로 제1지하국가의 모습들이 여기에 노출되어 있다. 관계자의 설명에 따른다면 그들도 망자들이 살고 있는 땅의 정보는 정확한 물증자료는 채집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곳을 유랑한 사람이 아주 드물게 있다고 한다. 세블국에 대한 자료는 텅텅 비어있는데, 제1지하국가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역사적으로 짧은 시간이어서 모인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이 땅은 하는 일의 성격상 낯선 사람을 단기체류 시키질 않고 장기간 두고서 관찰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그는 겁이 더럭 난다. 어쨌거나 재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예전과는 사정이 달라져서 빨리 다음 계단으로 가도록 해달라는 요구조건을 내거는 상황이 된다. 그에게 가해지는 압박이나 어려움은 없는데 33계단의 검우 영주 땅에서 죽는 날까지 살 수 있는 그는 아니다. 상대방은 왜 돌아가려는 것인가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솔직하여야 되느냐? 거짓을 가장 하여야 하나? 어느 쪽에도 무게를 두지 않고 원상회복을 바란다는 심정을 피력한다.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간 이 땅에서 대부분 적응하여 좋은 곳이라고 여기고 살아가는데 되돌아가려는 곳은 여기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잠정적 결론을 그들은 내린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낙원이 아닌 이상 사람들은 여기서 살았다는 것을 통계자료를 통하여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세블국의 나은 점을 실토해야 할 단계이다. 많은 부분 중에서 개척하지 않은 땅이 넓게 펼쳐져 있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자 그 땅의 개발과정과 이민 사업에 그들이 당연히 참여하여야 하는 것과 문서화하는 것을 제시한다. 상호이해와 평등정신에 입각하여 그렇게 할 것을 약속한다. 약속장소에는 많은 배석자들이 북적되게 됐지만 그는 혈혈단신의 사람일 뿐이다. 갈수록 태산인 것이 자꾸만 협정문에 서명을 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참모나 비서진의 정밀한 판단자료의 브리핑도 받은 적이 없이 계속된다면 이만저만한 판단착오도 생길 소지가 다분하다. 검우 영주는 멋있는 대화를 해주었지만 그 결실이 맺어지려면 그가 빨리 원상회복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어서인지 세블국에 돌아가는 일을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굴러 떨어지는 계단이 아니라 안전을 보장하여 34계단으로 안내해 준다.
34계단에는 부라 땅을 고영 영주가 보살핀다. 노란 벼들이 알알이 맺힌 들녘을 들어서자 끝없는 지평선에 출렁이는 알곡으로 풍년을 기약한다. 맑고 고운 하늘에 햇살은 따사롭다. 영주가 사는 곳으로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안내를 한다. 젖이 통통하고 육감적인 몸매의 아가씨는 공손하게 그에게 절을 한다. 34계단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온다. 마누라와 비슷하여 와락 껴안을 뻔 했으나 여기는 세블국이 아니다. 곱게 생긴 다섯 명의 아가씨들이 그를 에워싸고 논길을 유유자적 걷는다. 옛날의 시골길에 들어선 착각이 일어난다. 벼를 추수하는 가을철에는 반복되는 낫질을 하다 보면 목이 마르고 땀도 많이 난다. 쉴 틈에 마시는 주전자의 냉수는 그 무엇보다 맛있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떠가던 냉수도 없다. 기다리고 있으면 광주리에 점심밥과 물을 가져오는 어머니도 여동생도 없다. 대신에 처녀들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시원한 냉수를 한 잔 마시라고 권한다. 이것이 독약일까? 의심도 해보지만 마셔보니 목을 축여주는 샘물이다. 종달새도 지지배배 지즐대고 이름 모를 풀들도 많이 피어난 길이다. 지평선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왕궁은 볏짚으로 지붕을 올린 초가집이다. 감나무가 높이 서 있는 마당에 들어서니 고영 영주가 나오는데 미남의 얼굴에 행색은 시골 농사꾼이다. 적이 놀랍다. 아무리 보아도 촌사람의 모습이다. 아가씨들은 이 분이 영주이며 그들의 아버지란 것이다. 인사를 마치자 그들은 초가집 대청마루로 들어선다. 천정에는 고영 영주의 인장이 찍힌 대들보가 걸려 있다. 그는 오랜만에 고향에서 하루를 맞이하는 느낌이다. 닭들이 꼬꼬댁하는 마당, 소가 하품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기껏해야 꽁보리밥이나 먹는 곳이다. 식사로 꽁보리밥이 나온다. 눈물이 글썽거리며 알 듯 모를 듯 기분이 바뀐다. 그 옛날 아버지 모습이며, 돼지우리의 꿀꿀이, 탱자나무 담장, 꾸불꾸불한 동네 오솔길이 재현된다. 고영 영주가 입을 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몹시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많으시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도 답하여 대부분 사람들은 힘이 듭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며 살아야지요. 가난한 영주이지만 대문을 열면 또 대문이고 수많은 방들이 있다. 밤이 되자 방마다 호롱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열두 대문을 지나자 연못이 나온다. 연못에 다다르니 금붕어와 비단잉어들이 물속에서 이리저리 노닐고 있다. 연못 정자에서 아리따운 딸아이가 가야금을 연주한다. 이제 보니 고영 영주는 제법 왕같이 보인다. 아직 그대는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옳게 보지 못했지만 어제의 행색이 대체적인 농사꾼들의 모습이란다. 부라 땅에서 소출된 곡식으로 빚은 한 잔 술을 마시면서 그도 지난날의 지상국가에서 못다 이룬 일들이 떠오른다. 다시 찾아가고 싶은 동네. 그곳을 잊어버리려 해도 소용없는 것이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은은한 가야금 소리도 연주가 끝나자 쟁반에 담아오는 불로초를 맛보라 한다. 고영 영주는 스스럼없이 먹어보고는 권한다. 불로초와 불로주를 먹고 마시고 기분 좋은 하루가 된다. 날이 밝자 작별의 시간표대로 그는 다음의 땅으로 가야 된다. 떠나기 싫은 곳이지만 여기서는 아무런 협정도 맺지 않는다. 석양이 지는 논길을 아리따운 다섯 아가씨가 동행해준다. 서쪽하늘에 붉게 드리워진 한 폭의 그림은 언제라도 오고 싶은 땅이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맑은 샘물 한 통, 쌀로 빚은 술 한 통, 이 땅에서 사용하는 엽전 열 냥이다. 즐거운 발걸음으로 마을을 지나 어둑하니 나그네가 묵는 곳을 찾을 즈음에 홀연히 아이들과 부인의 모습이 나타나 허겁지겁 따라 나선다. 그러나 헛것을 본 꿈이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35계단에 그는 들어선다. 반가움을 지니고.
35계단 보모 땅에는 성후 영주가 그의 자취를 새기고 있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에는 다람쥐, 산토끼들도 자주 눈에 띈다. 사시사철 짙은 녹음이 사람들을 상쾌하게 해준다. 나무를 잘 타는 다람쥐는 폴짝폴짝 재주를 잘 부린다. 꽁지를 치켜세우고 돌돌돌 도토리방울도 굴린다. 재빠르게 사람을 피한다. 눈이 마주친 다람쥐는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친다. 떨어진 솔방울은 주워가는 짐승이 없고 사람들도 바짝 마른 것만 땔감으로 필요하지 시퍼런 것은 내버려둔다. 갈색으로 변한 솔잎들이 정강이가 빠질 만큼 쌓여 있다. 소나무의 밑둥치가 더 굵은 쪽으로 옮겨가자 쌓인 두께는 무릎을 넘어선다. 뱀들이 돌아다니면 영락없이 소란이 일어날 판이다. 뱀은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절대로 공격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해충이나 독사에게 물리지 않도록 특별한 장화를 신고 옷을 입었다. 어쩔 수 없어 행동을 같이 하지만 되돌아가지 않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다. 하늘에 태양은 떠 있는 듯한 데도 어두컴컴하다. 땀은 흘리지만 금방 증발해 버린다. 오히려 약간 선득선득한 느낌이다.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고 쉬고 싶다. 아무도 주저앉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서너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휴식을 취하고 장소를 골라서 모여 앉는다. 모두들 지친 줄 알았지만 힘들어하는 사람은 그 혼자이다. 이들은 종아리와 팔뚝에 두 개씩 네 개의 모래주머니까지 달고 있다. 이제나저제나 음식을 먹을까? 기다렸지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그들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다. 로봇들인가? 의심을 해본다. 정상적인 사람이다. 계속되는 강행군에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 항의해도 들어주지도 않자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늘어지게 두 다리와 두 팔을 벌리고 잠을 잔 것이 아니라 피곤하여 쓰러졌다. 일이 형편대로 정상화되다가 예전으로 고통의 계단이 되는 것인가? 두려움을 느낄 즈음에 약간의 정신이 든다. 이번에 걸어오는 무리들은 앞서의 사람들보다 완벽한 체력의 소유자들이 아닌 일반인들이다. 모래주머니도 안 가지고 다닌다. 목이 마르면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쉬거나 잡담도 심하다. 그를 보자 깨워서 물을 먹이고, 음식을 먹이고, 난리법석이다. 한참 자나서 기운을 차리자 좋아들 야단이다. 이들은 너무 느리게 행동하고 쉴 새 없이 영양보충을 하고 걸핏하면 주저앉아 꼼짝도 않는다. 행군의 속도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지만’ 이들은 식도락을 즐기러 온 사람들 같다. 갈수록 그는 카오스 상태로 돌아가는 듯하다. 담배연기는 담배가 다 타는 동안 나겠지만 그 움직이는 방향은 아무리해도 똑같지도 않고 알 길이 막연하다. 바둑판에 두는 바둑도 한 번도 똑같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도 반복하는 일이 아니라 똑같은 방법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너무도 천천히 산을 내려와 보니 그를 반겨주는 사람도 없다. 따라오는 사람도 없다. 따라 갈 사람도 없다. 나서서 나를 따르라 할 행세는 더욱 아니다. 도망가지 않아도 된다.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된다.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안 되는 것들은 무엇인지 차차로 벽이 나타날 것이다. 고통을 받는 일이 생기지 않는 대신에 밥을 공짜로 주지도 않는다. 관심을 가진 쪽도 생겨나지 않는다. 무표정의 사람들만이 북적댄다. 인사들도 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애써 알려고 노력할 필요성이 없다. 길가의 돌멩이에 이름을 묻고 성을 따지고 어쩌고저쩌고 참견할 성질이 아니다. 아무리 보아도 질서정연한 사회임에도 흐르는 기류는 무저항, 무협조, 비타협의 공기이다. 소나무 숲에서처럼 시끄러운 집단은 거의 보이질 않고 처음의 행동유형을 보이는 세상인 듯하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알려고 노력하여 무엇을 쌓아 올려보았자 너무도 허황한 탑일 때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다음 계단으로 끌고 가지도 않고 안내하지도 않는다. 무정부상태의 땅은 아닐진대 그에게 이제껏 행해져 오던 굴레는 도망가 버렸다. 도와주는, 괴롭히는, 가르쳐 주는,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관련이 되지 않고 무형식의 땅이다. 빨리 세블국으로 돌아가고 싶다하여도 들어줄 대상은 없다.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던 대로 36계단에 들어선다.
36계단 이곳은 바주 영주가 관리하는 강편 땅이다. 울퉁불퉁한 자갈길에 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난다. 텁텁한 흙을 콧구멍에, 입가에 묻히곤 길을 걷는다. 얼굴에 낀 기름과 먼지가 범벅이 되어 상쾌한 느낌은 아니다. 가까이 흐르는 개울물에 세수를 하고 땀을 말린다. 채 십 분도 안 되어 눈보라치는 겨울이다. 입은 옷으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여 산자락으로 피신하여 오들오들 떨면서 추위를 피할 궁리를 하건만 방법이 막연하다. 의식적으로 동굴을 찾아 이리저리 헤맨 시간이 무척된다. 탈진하여 엎어져도 사람들이 드물다. 지나치던 여우들이 그를 질질 끌어서 여우 굴로 데려왔다. 잠을 깨니 백여우가 있다. 깜짝 까무러친다. 비몽사몽간에 즐거운 일도 일어났으나 현실은 여우와 살게 되다니.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혼사 말 하는 데 장사 말 하는 식’이다. 강편 땅이 여우가 우두머리는 아닐 것이다. 도망갈 궁리를 하건만 ‘성균관 개구리인 형편에’ 실제상황의 상태에서 삼십육계는 성공한 적이 없다. 이러다간 여우들에게 ‘여울로 소금 섬을 끌래도 끌 일’이 생기면 큰일이다. 사람인데 여우에게 당해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어 ‘여윈 강아지 똥 탐하는 지경’이다. 에라! 이렇게 살 수는 없다. 큰 소리를 치고는 죽으라고 달렸다. 한 나절을 뛰다 지쳐 주저앉으니 새파란 잔디밭에 있는데 움직이는 이들은 여우가 아니라 사람이다. 다행히도 옆에서는 ‘여자가 셋 모여 나무접시가 드논다.’ 여우보단 수다쟁이 여자들이 훨씬 낫다. 가는 곳마다 이런저런 화제를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누구든지 세물영감이다.’ 이리저리 귀동냥을 하면서 꽤 먼 길을 왔다갔다가 한다. 어찌된 일인지 먼저 번과 이번에는 영주를 만나지도 못하고 융숭한 대접도 일어나지 않는다. 소속집단을 상실한 자유인이지만 이들과 완전동화가 불가능한 무국적자이다. 예전에 없던 검문소에서 신분증 제시를 요구할 때마다 이상한 사람대우를 받아야 한다. 강편 땅의 치안계통은 세블국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외교관, 특파원들을 많이 보내어 이들이 알 수만 있어도 이처럼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된다. 한참을 걸어가니 맑은 물이 흐르는 깊지 않은 강이다. 날씨는 쨍쨍거리는 한여름으로 바뀌어 있다. 더위를 참지 못하여 한바탕 목욕을 하니 시무룩한 감정들이 씻은 듯 사라진다. 맛있는 물을 버들잎을 띄워 박 바가지로 마시니 온몸의 피부가 매끄럽고 윤기가 반들반들하다. 깨끗한 솔잎을 씹어 먹으니 몸속의 독소가 몽땅 몸 밖으로 배출되어 핏속과 살 속에 상서로운 기맥이 통하여 가뿐가뿐하다. 몸에 좋은 것들을 매일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지역에서만 효력이 유지되고 딴 곳으로 옮기게 되면 그만큼 효력이 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일부러 헛수고 하지 말라는 충고이다. 그는 한 번 더 헤엄을 치고, 물을 마시고, 솔잎을 먹는다. 처음처럼 엄청난 변화는 생기지 않고 그저 정신상태가 맑아진 듯하다. 지치고 망가진 육신과 시달리어 휑한 정신까지도 정상으로 회복되고 있다. 세블국으로 돌아가는 일념으로 가고 있는데 언샘밭에 다다른다. 36계단의 마지막이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애래우캐리야 숲으로 이루어진 궁궐이다.
잠깐 사이에 두 계단을 덥석 뛰어오른다. 붙잡는 무엇은 나타나지 않는다. 훌쩍 여섯 계단을 뛰어오르니 금화, 전수, 방대, 종순, 검우, 고영 영주가 나란히 같은 계단에서 그를 맞이한다. 식구가 불어나자 그는 천천히 한 계단씩 같이 올라온다. 궁성에 다다르니 아직도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린다. 총독과 딸아이는 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이다. 여섯 영주와 집무실에 들러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다. 아직 한나절도 되지 않았는데 제1지하국가에서 무제한적으로 세블국에로 이민을 오고 있는 중이라는 급보이다. 맑은 이성으로 사람들이 그들의 터전에서 숨죽이고 기다릴 것이란 예측이 빗나가기 시작한다. 재빨리 미개척지 중에서 6등분을 하여 우주선들이 그 쪽으로 착륙하도록 계획을 짜고 여섯 명을 각각의 지역책임자로 임명한다. 세블국의 운명이 차츰 바뀌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