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에는 ‘왕산로’가 있다. 구미 임은동에서 태어나 일제침략과정에 첫 항일의병(義兵) 전쟁을 이끈 독립운동가 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 선생을 기리는 도로다.
왕산로가 끝나는 금오산 나월봉 자락에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이 있다. 왼쪽에는 ‘13도 의병총대장 왕산허위지묘’가 모셔져 있다. 선생이 삶을 마친 1908년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나라가 백척간두에 있던 시기다.
왕산은 선산의 유학자 집안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경전과 병서를 읽고 병법과 전술도 익혔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그는 항일 구국대열에 나서 1896년 김천‧선산 유생을 규합해 김산의진의 기치를 들었다. 1차 의병 활동이다.
이후 신기선의 천거로 벼슬로 나아가 원구단 참봉으로 관직을 시작해 성균관 박사, 평리원 수석판사, 재판장 등의 관직을 거쳐 종2품 의정부 참찬지위에까지 오른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한일의정서를 비판하고 온 국민이 의병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뿌렸다.
왕산 자신도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의병 활동에 뛰어들어 경기지역의 의병을 규합했다. 1907년 11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이 조직되면서 허위는 군사장을 맡았다.
목표는 일제 통감부와 이토 히로부미를 멸하기 위해 서울을 진격하기 위함이다. 허위의 의병부대 2000여 명 등 전국에서 48진 1만여 명이 양주에 집결했다.
1908년 1월 서울진공작전이 개시됐다. 허위는 부대별로 동대문 밖에 집결시킨 뒤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직접 진군했다.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면서 모든 지휘권을 넘겨받은 그는 동대문 30리 밖에서 일군과 접전을 벌였지만 화력도 병력도 일본군에 절대 열세여서 서울 진공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임진강‧한탄강 유역으로 물러나 항전을 계속하는 한편. 서울로 부하를 잠입시켜 ‘통감부를 철거하라’는 등 압박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해 6월 그는 불행히도 은신처에서 일제에 체포되었고 10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서대문형무소 1호 순국이다.
그는 유서에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왕산이 순국한 1년 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했다. 안중근은 거사 후 5차 공판에서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 같은 국욕(國辱)은 받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를 기렸다.
1962년 정부는 왕산에게 독립유공 최고훈격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기념관 언덕을 내려가면 임은동 가운데 왕산선생기념공원이 있다. 왕산의 생가가 있던 자리다. 공원 대나무 벽 앞에 왕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갓을 쓴 선비의 모습이다. 기념공원은 왕산가의 나라 사랑이 지금도 살아 있음을 보여 주는 상징이다. 왕산의 장손 허경성(92) 옹은 2005년 셋집에 살면서 조상이 살던 터 1990㎡(602평)를 구미시에 기부했다.
왕산이 일제에 체포된 뒤 가족은 핍박을 견딜 수 없어 해외로 뿔뿔이 흩어졌다. 허옹은 할아버지 거사후 전전하던 만주에서 태어났다. 1945년 러시아가 만주를 침공하자 이듬해 어머니‧동생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대구에 자리 잡았다.
광복과 함께 돌아온 고국에는 재산도 가까운 친척도 없었다. 그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다. 대구시의 임시직원으로, 부동산중개업으로, 마지막에는 중국음식점을 하며 자장면을 배달했다.
그 시기에 구미 임은동 생가가 매물로 나왔다. 허옹은 어려운 형편에도 할아버지 생가를 되찾자며 은행 대출을 받아 간신히 사들였다. 그 뒤 허옹은 구미시의 기념관 구상을 듣고 그 땅을 기꺼이 내 놓은 것이다. 구미시 관계자는 “기부 받은 땅이 시가 20억원 가량”이라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허경성 옹은 대구 산격동 주택에 살고 있다. 집은 조촐했다. 그래도 집에는 용케 넘겨받은 할아버지의 유서와 교지가 간직돼 있었다. 큰아버지 처가에서 몰래 보관해 온 유품이다. 6월에 왕산가의 호국과 보훈을 다시 생각한다.(동일문화 장학재단 협찬)
宋義鎬 (언론인,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중앙일보 기자(1985∼2017)
저서 『청량산엔 인문이 흐른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