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환 작가- 대구출생 .대구성광고 졸업 .경북대 독문과 졸업 <주요저서>마음 중 단편 .대불(시집) .김대중 .한국전쟁 언저리 .금호강의 영혼(시집)
#매주 목요일 연재
지하세계 1
9. 15계단에서 27계단
8계단에 이르니 양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면서 풀을 뜯어 먹는다. 성품이 후덕한 사람, 지식이 많은 사람, 자기직분을 열심히 해낸 사람, 그 누구도 다를 것 없이 뜯어 먹을 풀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표현한다. 사나운 행동을 하고 급기야는 양들이 서로 물어뜯고 피투성이로 죽기까지 한다. 인간만이 전쟁으로 서로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양의 무리들도 예외가 존재 않는다. 희고 보드라운 털에는 핏빛이 물들어 검붉은 무늬로 채색되었다. 원래의 흰털이나 회색 털을 곱게 간직한 한 마리 양도 찾을 수 없다. 양들은 다른 양을 죽이면서 묻힌 핏빛으로 인하여 무리들은 모두가 붉은 빛을 띤다. 원래 흰털을 가진 양은 생존에서 제외되어 저절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이 지배된다. 가장 힘이 세고 번식력이 강한 종류는 흰털에 피를 제일 많이 묻힌 양들이다. 약육강식의 질서체계에 정확하게 적응한 종이다. 이 질서는 우두머리 양을 따라 무조건 맹종하는 일로 인해서 대량적인 죽음이 비일비재하다. 만여 마리 양들이 가장 붉은 피를 많이 묻힌 양을 따라 사막으로 들어서면 모두가 풀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게 되어 죽어버린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걸핏하면 무리지어 가다가 상대방 무리에게 시비를 걸어 핏빛으로 싸우다가 한 쪽이 몰살을 해야만 시비가 끝이 났다. 평화적 지휘자를 선택하지 않고, 선택해서는 안 되는 양들의 사회이다. 양들은 이기심이 강하여 협력하여 좋은 결실을 맺는 경우가 생기지 않는다. 타자본위의 생활은 나타나지 않고 개개 양들의 즐거움과 세력 확장을 꾀하므로 홉즈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만 마리 양에 대한 만 마리 양의 싸움과 전쟁으로 나날을 보낸다. 양들의 세계에서는 최소한의 야경 국가적 체제도 성립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가장 힘이 세고 생존본능과 능력이 강한 지휘자 양을 불신하므로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아무리 내부싸움으로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하지만 선경험자의 체험이나 성공방법도 먹혀들지 않는 곳이다. 이런 형편으로 유지되다보니 지휘자 양들은 점점 하는 일에 신념이나 정당성확보가 미흡해지고 아무리 효율성을 제고하더라도 나머지 양들에게 배척을 당하므로 ‘될 되로 되라’ 식과 ‘에라 모르겠다.’ 주의로 일관하여 양들은 더욱 많이 희생되고 급속한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과거 월남정부도 월맹군에게 무너질 때는 화력은 7:1, 병력은 3:1로 우세했지만 한 달 만에 쓰러져 월남은 없어졌다. 양들은 자신들보다 더 약한 동물들에게 영역을 내어주면서 오히려 잡아먹히고 있다. 닭이나 토끼가 양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면서 양들이 죽고 멸종에 이른다면 생태계 법칙상 성립될 수 없는 일인데 양들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해 닭이나 토끼에게도 대응능력, 방어능력이 상실되어 죽어간다. 양들마다 마약에 중독되어 눈에 초점이 흐리다. 걷는 모습은 병자와 같다. 한 번도 즐거운 일이 생기지 않아 양의 세포구조가 우울증에 도를 더하여 웃음의 메커니즘을 상실 했다. 무반응의 생활이고, 무감각적이며, 생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없고, 온통 자포자기에다 빨리 망하자는 쪽으로 향한다. 이런 방식의 사회는 완전히 바보들의 행진의 수준을 넘어 집단자살로 마감하려는 어처구니없는 곳이다. 집단자살을 좋아하고 인정해주는 분위기라면 이만저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의 지도자층 그룹도, 0.003%의 지휘자 양들도, 모든 양들도, 집단죽음을 찬성하는 곳이다. 한심스런 것은 양들이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인사부터 ‘오늘 감사히 죽읍시다.’ ‘죽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당연시한다. 가치관이 뒤바뀌어 ‘살고 싶다.’는 생존의지를 나타내는 양들은 모든 양들의 적으로 간주되어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이율배반적이며 망하기를 좋아하는 곳이다. 멀쩡한 양들도 제 수명을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건만 ‘어서 죽자’를 외치는 미친 집단이다. 어찌된 셈인지 유행처럼 번지는 양들의 집단자살극이 계속 이어졌다. 약물에 중독되어 제 정신을 잃은 양떼들이 화산구덩이에 줄을 지어 들어서고, 깊은 호수에 줄줄이 뛰어들고, 높다란 산에 올라가 죽기 좋은 절벽만 골라서 하루․이틀, 한 달이고 계속 집단죽음을 연출한다. 절벽의 높이를 넘어서고, 호수의 물이 넘쳐버리고, 불구덩이가 메워지고, 죽을 장소와 방법이 가로막히자 이제는 그처럼 악귀같이 뜯어먹던 풀을 먹지 않고 굶기 시작한다. 그래도 좀처럼 죽지 않자 아예 먹을 풀과 물을 오염시키고 독약을 타고 하여 금방 죽을 수 있도록 상황을 바꾸어 간다. 양들은 ‘빨리 죽자’는 구호를 제일로 치는 세상이다. 늦게 죽는 자는 불행의 덩어리라 생각하고 한시라도 일초라도 어서 죽고자 행진을 한다.
9계단에는 사람을 닮은 잔나비들이 설치고 있다.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면서 재롱을 피우고 있다. 긴 팔을 이용해 풀쩍풀쩍 몸을 잽싸게 날린다. 바나나를 따가지고 냠냠 맛있게 먹는다. 하루 종일 장난을 치고 즐거운 소리를 지른다. 원숭이와 잔나비는 같은 동물인데 낱말만 다르다. 원숭이들은 놀랍게도 사람의 모습을 그린 깃발을 휘날리고 있다. 예전까지는 망자들이 동물깃발을 휘날렸다. 원숭이들은 사람들 흉내를 내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생활도 한다. 그들의 목표는 인간처럼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잿빛 털에 옷을 만들어 입으니 오히려 답답하여 벗어버린다. 구두도 만들어 신어 보았으나 나무타기에 불편하다. 땅에다 집을 지었으나 책걸상에 앉아 있으려니 엉덩이가 근질근질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의식주를 비슷하게 해보려는 첫 시도는 실패했다. 두 번째로 사람과 동등하게 글을 사용하기 위해 언어를 배웠다. 가장 간단한 ㄱ․ㄴ․ㄷ․ㄹ, 네 자를 배우는데 원숭이가 열 살이 되어야 비로소 가능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변화의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더뎌서 별 소득이 없다. 가장 효과가 빠른 것은 배설물을 바나나, 멜론 나무 밑에 집중적으로 뿌려서 맛있는 열매를 이듬해에 많이 얻는 것이 더 나은 일이다. 무리지어 살 때는 대장을 뽑아서 행동의 질서를 세웠다. 이것은 맹수류나 다른 짐승들을 상대할 때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개개의 원숭이들로써는 한 마리 호랑이에게도 꼼짝할 수 없지만 떼를 지어서 괴성을 지르고 합심하여 돌을 던지고, 나뭇가지를 휘저으면 호랑이도 멈칫멈칫 되돌아갔다. 원숭이들은 모든 짐승들을 붙잡지는 못해도 그들을 해칠 때는 방어할 방법과 능력을 거의 완벽하게 성공했다. 집단의 힘으로 가능했다. 그렇지만 사람의 무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되었다. 칼이나 총을 많이 훔쳐서 사람이 사용할 때는 응사를 했다. 이런 경험을 당한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도망갔다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원숭이를 몰살하려고 달려왔다. 탄약도 떨어지고 무리지은 원숭이들이 몽땅 죽고 말자 원숭이들은 인간을 피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들은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냄새를 퍼트리고, 장애물도 만들었다. 이것도 소용이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사람이 나타났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바위틈이나 땅속의 굴에 숨어들게 되었다. 아무리 보아도 원숭이의 양식이 없어 보이는 바위산이나, 인간이 접근을 꺼리는 늪지대나, 꺼림칙한 호수에 원숭이들은 모여서 생존의 법칙을 익히고 있다. 아무리 원숭이들은 그들의 생존여건을 개선시키려하지만 인간들의 행동여하에 따라 멸종될 수 있었다. 원숭이들은 인간과 불평등관계의 타협을 해야 했다.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든 선택이지만 그들의 목숨은 그들 스스로가 지킬 수 없는 한심한 상태였다. 원숭이띠의 망자들도 이들 원숭이와 똑같은 신세였다. 그들도 생존권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현실대로 생존하던지 죽어야 했다. 원숭이띠 망자들은 처량한 자신들의 정해진 삶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원숭이를 덜 죽였다. 아무튼 비슷한 처지를 생각한 이유이다. 원숭이와 인간은 닮은 부분이 무척 많다. 생김새도 그렇고 생명의 유한성에도 다를 바 없다. 어려움이 닥치면 집단으로 대응하는 방식도 똑같다. 망자들은 모든 것을 인정해 주지만 원숭이들에게 총을 줄 수 없는 한계에 직면했다. 절대로 무기를 원숭이에게 주거나 사용하게 할 수 없는 원천적인 불평등이 있다. 원숭이는 아무리 대접하여도 노예까지도 이르지 못하는 결론이 나왔다. 원숭이들은 교활했다. 짐승들은 느낄 수 없는 비참한 지경을 알면서도 적응력을 발휘했다. 노예근성과 애교를 떨면서 살아가는 원숭이의 생존방식을 접목시켰다. 원숭이들은 인간의 비열한 복종심과도 너무도 같았다. 인간의 비참한 생존방식과도 다르지 않다. 원숭이도 사람도 살기위한 방법에서 자연의 섭리를 거역치 못한다.
10계단에는 닭들이 모이를 이리저리 쪼아 먹고 있다. 닭띠 생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닭을 산채로 먹어버린다. 피에 굶주린 인간의 눈에는 모든 것이 먹을 수 있으며 가차 없이 허기를 채우는 물질로 보였다. 더욱이 돌덩어리나 흙을 입에 갖다 대고 빨거나 핥고 있는 어린아이도 수두룩하다. 최대한 30일을 굶어도 물만 공급된다면 생존이 가능한 족속이 인간이지만 두세 달 식량이 끊기자 그들이 기르던 닭은 한 마리도 남김없이 멸종되었다. 닭띠생의 사람들은 닭을 몰살시켰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달걀을 찾아 나섰지만 망자들은 한 알도 발견하지 못한다. 오히려 닭이 뜯어먹던 풀이라도 보존하여야 하건만 말라비틀어진 풀들도 모두 캐먹어 버려서 이제는 흙이나 돌을 배 속에 채워야 할 단계이다. 닭띠 생들은 12가지 짐승을 표본으로 태어난 사람숫자 중에서 1/12만 차지하면 되는데 웬일인지 월등히 많은 듯하다. 망자들은 생존을 늘이려면 새로운 식문화와 생존문화를 만들어야 했다. 60일 굶어도 살 수 있도록 체질개선을 시도했다. 세례자 요한은 40일 금식하였다고 성경에 적혀 있다. 6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는 신화를 닭띠 생 망자들은 실천해야 했다. 모두들 미친 짓이라 생각하다가 제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이성적 판단을 내려 보니 그래야 맞았다. 그들은 상징조작과 망자들에게 속임수를 서서히 썼다. 우리들 모두는 40일 굶어도 끄덕하지 않는 기본적 인간들이다. 더 훌륭한 사람은 백일을 굶어도 괜찮으니 걱정 말고 닭띠 생 법률을 따르라고 교육과 법적장치를 만들었다. 이 방법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적으로 되어갔다. 백일 굶는 망자는 나타나지 못했지만 보통망자들도 24일 굶었다. 25일 굶었다. 하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메뚜기와 석청이 공급되지 못해도 40일씩 굶는 족속들이 수두룩하게 생겼다. 90일 굶다가 죽어버린 망자들도 나오고 했지만 언론을 통제하므로 굶다가 죽었다는 사실은 발표하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집단자살로 굶어죽겠다는 식의 이념이 팽배해 있는데 실제로 굶어죽었다는 사건이 한 건도 일어나지 않는 기괴한 땅이다. 망자들은 약간씩 속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분명 굶기를 하다가 옆에서, 다른 곳에서 죽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죽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다른 것 같았다. 기운이 빠져 반항을 할 능력도 없지만, 그들은 우리들이 지금 당장 죽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움직이는 지도부에 화살이 집중되게 되었다. 닭띠 생 망자들의 지도부는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 사실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있는 그대로 닭띠 생 망자들을 이끌어 갈 때 닭띠 생들은 절망으로 인해 스스로 생을 포기해 버릴 위험성이 있었다. 좋지 않은 상황을 좋은 상황이라고 거짓말을 하여서라도 사태가 악화되지 않는 쪽으로 생각을 가지게 됐다. 없는 달걀도 있다고 선전하고, 멸종된 닭들도 실컷 먹을 수 있으니 참으라고 계속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망자들이 집단행동을 보이면 가짜 달걀과 닭을 만들어 정보요원을 통하여 먹고서 금방 살아나는 것처럼 조작도 했다. 비참한 인간들이다. 다 죽어가던 닭띠 생 망자들이 금방 죽을 것 같다가 달걀 하나 얻어먹으려고 발버둥치는 바람에 며칠을 더 생존을 하곤 했다. 인간의 한계점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백일을 물 한 방울 공급되지 않았는데도 죽지 않은 실제사건이 일어났다. 양식이 없어 어쩔 수 없어 죽게 내버려 둔 집단에서 다 죽어 버렸는데, 숨이 붙어 있는, 유전자에 변종을 지닌 사람인지, 그런 부류가 있었다. 온통 법석에다가 유전형질을 조사해 보았지만 특이한 것은 없었다. 이점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누구나 이럴 수 있으며 희망을 가지고 살자고 떠들어 대었다. 놀랍게도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효과가 있었다. 육체적 힘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는 정신력이 약간은 존재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정신적 힘을 치켜세웠다. 어느 망자들보다 닭띠 생들은 치열한, 끝없는 정신적 깨달음이 죽음에 대항할 무기임을 내세웠다. 총독의 남편은 정신을 차리고자 안간힘을 써 보았다. 팔다리도, 머리도 꼼짝을 못하고 아무런 상황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닭띠 생들은 살아나겠다고 노력을 하건만 정해진 순서에 따라 다음 계단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11계단에는 표독스런 개들이 득실득실한다. 개 같은 오후처럼 늘어지게 잠을 자고 게을러빠진 개띠 생 인간들이 빈둥빈둥 거린다. 모두들 개를 닮아 목에는 개 사슬처럼 매달린 줄이 사람들 목에 걸려 있다. 이 인연의 끈에는 유독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만 기록되어서 그들을 괴롭힌다. 선린의 관계나 평화분위기에서 좋은 열매를 맺은 때를 인식시키고 들추어내는 작업은 미루어지고 싸움과 파괴만이 강조되어 알게 된다. 사람들은 성인군자도 아니고 그냥 사람이다. 일반 개띠 생 망자들에게 그들의 도덕성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요구한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인간성을 지켜내지 못하는데 따른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인간들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나 수치심이 유발되는 간통이나 화간의 문제, 절도, 살인 등 들추어낼수록 기분이 상하여 죽을 때까지 묻어두고 싶은 것들로 가득한 세월을 보낸다. 죽기 얼마 전에 잘못을 뉘우치기도 하고, 영영 아무 말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나 망자의 동산에 모이기도 한다. 너무나 서글프고 비참한 사실은 각 개인이 덮으면 덮을수록 그 일을 상대방이 낱낱이 알도록 체계가 잡힌 개띠 생의 사슬이다. 이 사슬은 자신은 쉽게 해독이 안 되지만 상대방은 거울을 보듯 훤히 비치게 된다. 예비 살인범, 예비 절도범이 드러난다. 상대방이 상대방을 자신보다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몹시 불편하고 소름끼치는 일이다. 동시에 착한 점도 알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런 방식은 통용이 안 된다. 불신, 반목, 싸움, 의심의 연속이다.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할수록 엄청난 파고로 인연의 끈들은 허물어지고 웃음도 즐거움도 모두 사라진다. 만나는 사람마다 해롭게만 생각되니 사람들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모두가 원수인 상태로 이루어진다. 협력은 고사하고 분쟁거리만 늘어간다. 인간내면의 올바름이 비뚤어져 잘못된 가치구조와 사회법칙이 뭉게구름 일 듯이 퍼져나간다. 한 모금 물을 마신 사람이 한 달을 기절하고 나서는 어디에서도 물을 입에 대지 않아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되어 1/3 모금의 물을 마시니 또 석 달을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이 사람도 다른 사람도 모두가 맑은 물이 흘러가도 목이 타서 죽기만 기다리고 있다. 한 숟가락의 음식을 떠넘기다가 복통으로 일 년을 고생한 사람은 십 년 내내 음식물 기피증에 시달린다. 개띠 생이 모인 이 땅은 사람들이 사람에 대한 공포심으로 인해 길가다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서로가 도망을 친다. 오히려 으르렁거리는 개를 만나서 자기편은 이 개들이 진실인 것으로 착각하고 개들과 친밀하게 살아간다. 개띠 생, 사람들이 개를 사랑하는 것은 나쁘진 않다. 그 사랑하는 밑바탕에는 인간을 증오하고, 인간을 믿지 못하는 토양위에 세워져 있음이다. 사람은 사람을 믿지 않고, 개도 믿지 않지만 개를 더 가까이 하는 기괴한 구조로 잘 살아간다. 날이 지날수록 사람이 있어야 할 영역에 개들이 등장한다. 슈퍼에는 개가 값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준다. 극장에서 질서를 관리하는 일을 개들이 한다. 사람들이 잘못하여 재판이 열리면 개가 재판장 자리에 앉아서 판결을 한다. 교도소의 간수자리는 개들이 차지했다. 모든 관리와 정치적 기능은 개들이 하고 사람들은 개들이 지시하는 개 사슬에 묶여서 사람은 의심하지만 개들을 마지못해 신뢰하는 땅이다. 멍멍이와 인간의 지위가 뒤바꿨다. 멍멍이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한 방을 차지하고, 사랑을 받건만 인간은 맛없는 밥을 먹고, 추운 헛간을 차지하고, 서로가 질투와 의심과 분쟁을 일삼는다. 전쟁이 터지면 개들은 전선에 투입되지 않는 대신에 인간들은 서로가 총을 들고 죽기를 밥 먹듯 한다. 개는 인격적 대우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지만 인간은 개보다 못한 이상한 형태의 학대를 받는다. 제 정신을 잃고 살아온 개띠 생 인생들은 개 사슬을 끊어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서려고 애써보지만 너무도 철벽같이 서로가 의심으로 쌓아온 성이 견고하고 두텁다. 인간이 개보다 못하게 되기를 수백만 년을 계속하였으므로 엄청난 시간을 쏟아 붓지 않고는 원상태의 회복이 쉽지 않다. 인간은 인간인데 왜 개보다 못하도록 살아가고 그처럼 체계를 세울까? 인간은 개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개보다 더욱 나쁜 습성과 더 악랄한 방법으로 그들 사회를 꾸미려 하는가? 개띠 생 망자들은 개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들은 굳어질 대로 굳어진 개 이하의 사고와 개보다 못한 인간사회 틀을 유지시켜 오고 있다. 이 땅에 들어선 사람은 이 땅에서 벗어날 일이 생기기 전에는 개보다 못한 인간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
12계단에는 복스러운 돼지들이 꿀꿀거린다. 이 무리에 섞여 있는 돼지띠 생 망자들은 모든 일을 ‘똥 마려운 계집 국거리 썰 듯’한다. 다리를 놓으면 내일도 안 되어 무너진다. 제방을 쌓으면 그 자리에서 허물어진다. 운동장을 만들어 놓으면 돼지들이 뛰놀 정도도 못되고 더욱이 사람이 들어서지도 못할 지경의 쓰레기통이 된다. 모두가 자기 일만 챙기지 서로가 공존하는 법칙은 성립하지 않는다. 실제의 돼지들은 상당히 깨끗하고 좁은 우리에서 화장실과 식당을 정확히 구분하여 사용한다. 인간들은 오히려 더 추잡하다. 돼지와 똑같은 공간에 넣어 놓으면 100%가 정신병자가 돼버린다. 돼지들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자기 위장에 무리가 가는 범위를 넘지 않지만 인간들은 걸핏하면 배가 터지도록 많이 먹어 소화제를 사먹고, 성인병이 걸리고, 난리법석을 떨고, 운동이다. 미용체조다. 쓸데없어 보이는 짓거리도 너무도 많이 한다. 적당히 먹으면 고생도 안 할 것이지만 자기분량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일을 스스로 해내는데 실패하는 돼지띠 망자들이 많다. 돼지들은 인간들에게 너무도 혹독하게 대접받아 자기 몸에 비례해 상상하기 힘든 좁은 공간에서도 싸우지 않고 잘 살아간다. 인간들은 한 평 정도의 좁은 공간에 두 사람만 가두어 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살인사건이 일어날 지경이고 진짜로 서로 죽이기도 한다. 돼지는 그런 일이 없다. 인간들은 감옥에 가둘 때도 죄질이 무거우면 여럿을 같이 둘 수 없어서 독방에 따로 가두어야 한다. 아무리 말없는 짐승이지만 돼지는 좁은 한 우리에 몇 마리를 넣어도 서로 죽이지는 않는다. 간혹 새끼를 놓다가 자기 새끼를 깔아 죽이는 바보짓도 하기는 한다. 원채 몸이 무거워 감각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수명이 20년인 돼지를 대부분 2년이면 잡아먹는 탐욕의 덩어리인 인간들은 교묘히 자신의 욕심을 위장한다. 아무리 숨겨 봐도 소용없는 것이건만 그래도 꾸준히 변형된 형태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사람들은 가까운 자신의 피붙이나 동료들에게 들통이 쉽게 나자 ‘먼 데 무당 용하 듯’ 가까운 이들을 피하고 낯선 사람을 우선시 한다. 인간관계는 늘 표피적 내지는 연속성을 추구하지 않고 단발성에서 속임수를 쓰는 사기꾼의 세상이다. 돼지띠 중에 부자가 아닌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지위가 모두 높다. 우두머리는 빠짐없이 전부이다. 금방 사실이 탄로나 버리지만 그래도 꼼짝도 않고 그렇게들 살고 있다. 돼지는 맛있는 고기라도 주지만 탐욕으로 얼룩진 인간들은 아무런 순기능적 일이나 사회를 아름답게 꾸미지 못한다. 돼지띠 망자들이 모이면 500층 빌딩이 만들어지고, 지하도시도 얼렁뚱땅 손쉽게 이루어낸다. 이들의 구호와 계획은 하루에 정부를 몇 개씩 만들고, 수억 명이 졸지에 지상낙원․지하낙원․우주낙원에 살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작심삼일 못가서 정부가 쓰러지고, 지상지옥의 상황이 연출된다. 사람들은 조석변개하기를 ‘식은 죽 먹는’ 격이라 신뢰성에 먹칠을 하게 되고 돼지띠 망자들이나 망자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은 살아있는 돼지띠 중생들에게 허황된 탐욕의 그림자와 찬란한 탑을 세우게 만들고 있어서 큰 문제다. 깨우친 자들도 절대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약간 탐욕이 보통사람보다 적다는 수준이다. 비교하기에는 부끄러운 자를 가지고 서로를 갈라놓는다. 이 땅에서는 탐욕을 부추기는 발전모델과 도덕률이 우세한 쪽이다. 아무리 상대적 균형을 외치지만 사람들 본성 속에 숨어서 질기게 기회를 기다리고 꽃을 피우길 원하는 심성의 밑바닥을 뜯어 고치기는 한계에 다다른다. 새롭게 살고 있는 지상이나 우주공간이나 지하정부의 후세들이 유전인자 속의 변화, 개선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정신구조의 변혁은 유전정보로도 설명이 곤란한 어려움이 있다. 탐욕의 무리들이 요란한 힘으로 거센 행진을 한다. 그들의 발걸음을 막아주는 선지자도 없다. 그들의 힘을 낮추어 줄 진정한 신사숙녀도 그들의 일을 정성껏 하지 않는다. 너도 나도 돼지보다 더 욕심이 많다고 행동해도 정당하게 받아들여진다. 정당성이 왜곡되어 배가 부르고, 돈만 넘치고, 물질만 흥청망청 많으면 좋은 곳이다. 모든 것은 수치화된 욕심이 바다를 이루고, 산을 만들어, 탐욕의 비린내로 세상이 시끄럽다. 망자들은 욕심을 포기하는 날, 힘없이 거꾸러지고 죽어버린다. 가장 심하게 돼지인 자들이 힘차게 살아가는 곳이다. 욕심을 떠난, 욕심에서 몇 발자국 걸음을 놓친, 사람들은 병신머저리가 된다. 끝까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자가 옳은 곳이다. 이번에는 두 국가 간에 외교문서로 작성하여 다른 나라의 집을 지어주고 대가로 공장을 지어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리하여 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다른 나라 국민을 위해 많은 집을 지어주었는데 그 대가로 공장을 지어주지 않자 외교적 분쟁이 일어났다. 모든 나라들이 모인 곳에서 이 사실을 알리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주기를 원했지만 도무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곧바로 힘으로 혼내줄 형편도 못된다. 실컷 도움을 주었지만 아무런 혜택도 없고 오히려 원망만 듣게 되고 괘심하기 짝이 없다. 서로 지키기로 한 사항을 이처럼 무용지물로 만들고 상대방을 바보처럼 상대했다. 손해를 본 국가의 실무자는 여러 가지 방책을 짜보았다. 원상태로 주고받는 것이 회복되는 것,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치 않도록 하는 것, 차후에 돌려받는 것, 이런 일들은 긍정적으로 내다본 일이었다. 부정적 견해는 상대방국가가 깡그리 무시하고 뒤엎어버리고 침략을 해올 때 대비책이 있어야 했다. 그러면 전쟁을 쳐서 이기면 되겠지만, 이겨도 희생이 너무 크고 지게 된다면, 어처구니없는 지경에 빠진다. 자위권을 발동한들 너무도 차이가 나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현실이다. 그저 속을 푹푹 섞이고 있다. 일반 국민들에게 알린들 국수적 성격만 부각되겠지만 실리적으로 득이 못된다. 매일하는 외교업무가 당하는 일 뿐이다. 한 번도 대등적 입장에서 균형을 이루어 본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평등조약으로 일관된 오랜 세월이었다. 겉으로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사실, 모든 일들이 진행되면 문서상의 조약은 소용이 없고 멋대로 바뀌어 버렸다. 그래도 상대방 국가의 위세에 눌려 그대로 살아가는 양 국가이다. 옆의 나라들도 ‘꿀 먹은 벙어리요. 침 먹은 지네라.’ 힘센 나라는 갈수록 재물이 많아지고 힘이 불어났건만 약한 나라는 갈수록 더 약해졌다. 원수진 일이 없는 나라가 상대방이 원수로 변해 가고 있으니 적개심이 부풀어 오르지만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위험한 게임을 해서는 안 된다. 기껏 힘을 기르자. 점진적으로 공든 탑을 세우자. 비폭력 무저항으로 나가자. ‘그 나물에 그 밥’의 방법밖에 나오질 않는다. 힘이 모자란 나라들 끼리 힘을 합치는 것은 가장 처참하게 보복하였다. 보복이 심할수록 투쟁의 강도도 세어진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살기가 훨씬 수월한데 약한 나라가 정성을 덜 쏟아서일까? 분석해 보아도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강한 나라가 너무도 오만불손한 것이 탈인데. 이 문제를 해결할지라도 다음 단계에 들어서면 평화의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 상대방이 억지로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동행하고’ 종교적 노력도 기울였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자 죽기 살기로 투쟁하는 방법을 택하는 극한적인 나라가 되었다. 결전의 날을 앞두고 약한 나라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무기를 사들이고 힘에 버거운 전쟁이 일어났다. 추풍낙엽으로 쓰러져버려 일주일도 못되어 약한 나라는 강력한 나라에 희생이 되었다. 구경꾼들은 모두가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모택동에게 패한 장개석 군의 일부 부대가 현재의 미얀마 예전 버마의 국경을 넘을 것인가를 장개석에게 물었다. 장개석이 ‘국경을 넘지 말라’고 했다. 미얀마는 패전한 군대의 일부 병력에게 나라가 망하게 될 운명이었다. 위만 조선도 중국 대륙에서 패한 일부 군대가 한반도를 접수해 버렸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전쟁전문가인 장개석은 한반도 삼천리의 8배를 넘는 2만 5천리를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책만 주무른 사서 출신인 모택동을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살아남은 홍군에게 포위되자 황하에서 많은 수의 배를 동원해 결사적으로 도망쳤다. 황해로 나와서는 지금의 대만으로 향했다. 4억의 나라에서 13억이 된 나라에서 쫓겨나 이제야 2천만이 넘은 소국의 총통이 되었다. 죽어서는 중국 본토를 수복할 때까지 시신을 땅에 묻지 말라고 유언하여 매장도 못한 채 땅위에 관을 그대로 두고 있다. 현재 대만 총통 천슈이벤은 대만 원주민 출신이다. 약한 나라는 멸망해 버렸다. 다음 차례는 이 망한 나라에게 무기를 팔았다는 죄목에 걸린 국가였다. 팔고 싶어 판 것이 아니라 무기를 팔지 않으면 자기나라 국민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농업도 공업도 아무런 식량이 생기지 않았고 오로지 싸움에 필요한 인간 살상용 무기만이 그들이 거래할 수 있는 수출품이었다. 서글프게도 무기산업 이외는 자력으로 살아갈 방법이 없는 나라이다. 남녀노소 모두가 군인이다. 군인이 아닌 사람은 갓난애뿐이다. 이처럼 많은 군대병력을 지니고 있는데도 기초적 밑바탕이 너무도 허약하다. 무기를 식량과 바꾸지 않으면 당장 궁핍의 그림자가 이 나라를 뒤덮는다. 힘센 나라는 식량을 끊어버렸다. 두 달이 가고, 이 년이 가고, 십 년이 가면 모두 굶어죽어야 하는데 이상스럽게 식량생산이 중단된 병영국가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기괴한 일이었다. 현재도 대부분의 국가가 2개월만 석유공급이 끊기면 대혼란에 빠진다. 해방 당시 패전국 총독은 한국의 대표자에게 확보하고 있던 전 조선인 2개월 치의 식량과 일본인의 무사철수를 맞바꾸었다. 보유한 식량이 2개월 치이다. 자세히 내막을 들여다보니 이 나라 사람들은 무기를 갉아먹고 살았다. 쇠를 먹고 사는 종족이다. 겉보기에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듯 했는데 쇠를 농기구로 바꾸어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공급하고 있었다. 용케도 살 수 없을 정도의 물자를 가지고 최하의 생활상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래도 군사노선을 내던지지는 못하고 있는 나라였다. 이 나라 국민들의 꿈에도 소원은 실컷 먹고 놀자. 이 마음뿐이다. 한 번도 긴장을 늦추고 시원스레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귀찮고 골치 아픈 이 나라의 살림꾼이 그 앞에 나타나서 도움을 요청한다. 애절한 구걸을 하고 있지만 그도 정신이 혼미하여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궁으로 돌아가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상태이다. 13계단에서 만난 비쩍 마르고 비칠비칠 걸음도 못 옮기는 사내는 아무리 보아도 사람 같지 않다.
힘센 나라의 감시구조체계의 말단부서에 근무하는 한 청년이 적대국가의 안쪽을 세밀하게 들여다보았더니 이것은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개밥도 못 먹고 살아가고 있었다. 하루 중 노동시간이 무려 20시간에 달하지만 아무런 불평도 않고 질서정연했다. 생산기구는 원시적 방법을 사용하는데 500백 년 이상이 뒤처져 있었다. 비교하는 자체가 무의미했다. 이처럼 혹독하게 다루지 않아도 발전의 폭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란 분석도 있지만 철두철미 단, 1mm의 앞서가거나 차이를 메울 수 없도록 조처했다. 원칙은 1mm의 후퇴는 인정하였다. 같은 인간으로서 이렇게 하는 것은 반인류적 폭거라고 생각되었다. 자기의 바로 윗선에서는 ‘모르겠다.’ 주의로 넘어갔다. 생각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 위 단계에서는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각 단계마다 생각이 다르다. 태어나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같은 일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혀 다른 상태의 사람으로 바뀌었다. 각 개인의 주체성은 상실되고 집단의식이 세분되어 특화되었다. 의사결정의 구조가 인간성의 보편타당에 기준한 것이 아니라 국가이기주의, 국익우선주의에 따라 엄격한 통제를 통해서 서로가 협력하는 모델설정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구조였다. 한 청년이나, 아리따운 처녀가 국제주의, 인본주의를 찾더라도 그것은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뒤틀릴 수 있음이 명백했다. 엉성한 코스모스화를 생각해서는 생존을 위협 당했다. 새로운 법률 앞에 힘센 나라의 젊은 세대들은 강력한 가치붕괴를 경험하게 되고 회의론자가 됐다. 일방이 살찌게 되고 일방은 주저앉게 되었지만 긴 시간의 연결에서는 힘센 국가는 궁핍의 몫을 이유를 막론하고 떠맡아야 될 세상도 올 수 있었다. 이런 가정을 정당화시키지 않는 것이 국법이었으나 이 국법에 한심스러움을 느끼는 세대들이 많아진다면 그 일로 인하여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떻게 달라지는가? 쉽게 예측을 하기는 어렵다. 다음을 책임질 힘센 나라의 세대들이 양심과 정의에 의해서 국가발전에 대한 후퇴국면에 사로잡힌다면 반사적 이익이 비틀거리는 나라에도 도움이 될지 알 순 없어도 꼭 그렇게 되란 법이 아닌 것이 현실이었다. 약한 나라는 ‘망하자’ 주의가 판을 치는 상황이어도 망하는 시간이 소요됐다. 흥하기만 하는 강대제국도 시간이 필요했다. 세계의 공동선은 서로가 망하지 않고 잘살아 가자였으나 변질상태가 너무 크다. 어떤 면으로나 천 년 앞서고 부러운 나라의 지도자라도 그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부활할 수 없었고 사람의 마음을 영원히 붙잡을 수도 없었다. 자신의 뜻과는 관계도 없는데 모든 광경을 보고 있는 그도 약한 나라의 누구로 되기도 했고, 힘센 나라의 누구로 될 수도 있었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다. 옆에서 지켜본 자에 불과했다. 같이 있는 사람에게 이처럼 혹독하게 관찰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항의한들 아무런 메아리도 울리지 않았고 동조자도 나타나지 못했다. 고립무원의 탈진상태가 십 년이 된 것 같기도 한데 도대체 풀어주지 않았다. 정말로 기가차고 화가 솟아났건만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이렇게 애먹이지 말았어라. 그 심정이었다. 14계단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