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최근 한국과 미국을 향해 강경 담화문을 발표하고 연이어 청와대에서 “북·미가 서로 상대방 입장에서 역지사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놓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단어가 갑자기 정치권의 예민한 논쟁 대상이 됐다.
언제 들어도 공감이 갔던 이 사자성어가 정치권에선 만신창이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니 정치가 무섭긴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 신문사 정치부에 근무했을 당시 썼던 기사를 찾아보니 ‘역지사지’라는 말을 광역단체장들 사이에선 비교적 자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안이 충돌해 서로 설득이 필요했던 단체장들끼리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며 사용한 케이스들이다. 이 말을 가장 애용했던 정치인은 현재 ‘충청대망론’을 띄우고 있는 이완구 전 국무총리다.
주요 공직을 거의 다 거친 이력 때문에 작은 나라라는 말을 들었던 그는 충남도지사 시절 수도권 규제완화와 기업유치 문제 때문에 김문수 당시 경기도지사와 상당히 껄끄럽게 지냈다.
그래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생각해 낸 게 일일 교환근무였다. 서로 상대 도청에 출근해서 직원들에게 도정현안 보고를 받고 토론 시간도 가지면서 상생하는 방안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는 이를 ‘역지사지 근무’라고 명명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상대편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풀 수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 전 총리는 지난 2007년 도청이전과 관련한 예산확보 때문에 같은 처지로 머리가 아팠던 김관용 경북도지사에게도 역지사지 근무를 제의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하루 정도 도지사직 교환을 해서 도정업무 보고를 받으면 상대 도의 업무도 파악할 수 있고 각 실국장의 애로점을 들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획기적인 행정혁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전 총리 말고도 김범일 전 대구시장도 지난 2013년 강운태 당시 광주시장과 하루 날을 잡아 역지사지 교환근무를 해 영호남지역 언론에 화제가 됐다. 두 단체장은 교환근무 후 상대시정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으며, 수도권 광역화에 대한 공동대응을 다짐하기도 했다.
이처럼 과거 정치권에서도 긍정적으로 쓰여 왔던 역지사지라는 말이 현재 첨예한 논쟁거리가 된 것은 여야의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태도 때문이다.
청와대가 북한과 미국에 주문한 역지사지는 그동안 북미가 회담을 준비해오며 서로 입장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서로 간에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를 해보려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언론보도를 종합해 보면 청와대의 언급에 대해 긍정적 해석을 하는 측은 한 마디로 어떤 현상이든 역지사지 정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강경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북핵의 미국 반출 구상까지 언급하며 강경한 비핵화 해법을 강조한 것이 협상 전술일 수는 있지만 상대 처지를 너무 무시한 말이 아니냐는 것이다.
북한 입장에 서보면 핵을 포기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무아마르 카다피 사례(리비아 모델) 때문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역지사지 언급에 대해 부정적 해석을 하는 측은 한국이 괜히 미·북 중간에 서겠다는 말로 들려 미국이 기분 나빠 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쓸데없이 중재자 역할을 자초했다는 얘기다. 북핵 폐기 말고는 답이 없는데 무슨 역지사지를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깔려 있다.
역지사지란 단어 하나로 촉발된 정치권의 충돌을 지켜보면서 아마 나처럼 우리나라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이 자기관점이라는 ‘딱딱한 문’에 갇혀 서로가 처해 있는 입장을 외면해 버리면 민주주의는 절대 성숙할 수 없다. 상대를 제대로 보려면 서로가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봐야 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동일문화 장학재단 협찬)
심충택
(언론인,대구경북언론인회 부회장)
경북대학 치과병원 상임감사
대구문화재단 이사
대구지방법원 조정위원
전)영남일보 편집국장,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