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지
김동원
내 손을 나꿔 챈 그녀에게 아내가 있어 안 된다고 했다. 곁에 벗은 예쁜 속옷은 유채 꽃빛이었다. 등 뒤에서 그녀가 “오늘 밤만이라도 하늘 물속을 헤엄쳐, 저 샛별까지 갈 수 없냐”고 내 허리를 꽉 깍지로 껴안았지만, 나는 두 자식이 있어 진짜, 안 된다고 뿌리쳤다.
돌아보지 말걸, 꿈속 그녀는 알몸으로 초승달 위에 웅크려 울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 밤부터 꿈만 꾸면, 구름 위로 떠오르는 달에게 올라타는 연습을 한다. 제멋대로 엉켜버린 두 인연이 천년의 허공 속에 헛돌지라도, 미친 듯 미친 듯 그녀를 위해, 나는 밤마다 꿈속에서 달을 타는 연습을 한다.
깍지」(4시집『깍지』, 그루 2016)는 스물 무렵 어떤 여인이 등 뒤에서 나를 꽉 깍지로 껴안은 사건이, 수 십 년 기억 속에 묻혀있다 불현 듯 떠오른 작품이다.
이 시는 꿈의 무의식이 몸의 의식을 뚫고 나와 꿈속 허무와 재결합 된다. 그 강렬한 ‘깍지’의 잔상은 행간 속에 껴안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껴안고 싶은 충동 사이에 끼인다.
몸의 각인은 모든 경계를 초월해〈하늘 물속을 헤엄쳐, 저 샛별까지〉닿아 있다. 몸이 순간이라면 깍지는 영원의 끈이다. 하여, 나는 그녀가 허리를 꽉 깍지로 껴안았지만, 두 자식이 있어 진짜, 안 된다고 뿌리친다.
이 시행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하여,〈제멋대로 엉켜버린 두 인연이 천년의 허공 속에 헛돌지라도〉그녀에 대한 나의 기억은〈밤이면 밤마다 꿈속에서 달을 타는 연습〉을 가능케 한다. 이런 감각은 꿈을 낳고 사랑을 낳고 역설을 낳는다. 허무가 아름다운 것은, 꿈속 이미지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깍지를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 조여드는 느낌이 시의 흐느낌이다.
그것은 나의 금기 위반〈돌아보지 말걸〉이나, 그녀의 웅크린 자세에서 찾아진다. 특히〈알몸으로 초승달 위에 웅크려 울고 있〉는 그녀는 허무라는 빛이다.「깍지」는 꿈속의 꿈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알고 보면, 우주는 ‘깍지’로 이루어져있다. 여자와 남자, 해와 달, 물과 불, 바람과 구름, 하늘과 땅, 이 모든 중력은 서로가 서로를 껴안고 있는 ‘깍지’이다.
표층의 의미는 몽환적 시적 상황이 주제이지만, 심층엔 ‘시의 애내(欸乃)와 이별의 흐느낌’이 어룽져 들린다. 그 소리는 마치 물결과 달빛 사이 깊고 웅숭한 바다 속의 슬픈 곡조처럼, 여인의 울음으로 은유된다.
그래서 깍지의 비밀은 영혼의 깊은 늪 속에 잠들어 있는 우리들의 금지된 장난인 ‘에로티시즘’을 한순간 불러 일깨우는지도 모른다.「깍지」는 이유선 시낭송가의 목소리로 예술기획〈진진아트〉에서 영상시로 제작해 유튜브에 올려졌다.
구름 위에 전라(全裸)로 춤을 추는 시속 여인의 등장 화면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화면 가득 유채 꽃밭이 펼쳐지고, 남자의 허리를 깍지로 꼭 껴안은 시 속 여인의 심경은, 영상시가 아니면 못 볼 리얼리티의 극점에 놓인다.
특히, 초승달 위에 알몸으로 웅크린, 사랑을 잃은 여인의 고뇌는 참으로 시적이다.
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