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속 물이 차
김동원
띠풀은 귀를 허공에 넣고
비가 비 소리 몰고 오는 짓을 다 듣고 있었다
그 아랫도리 벌쭘한 새 무덤 위에서
참 희한도 하지
비가 비 소리 몰고 가는 짓을 다 알고나 있었다는 듯
띠풀은 귓속 물이 차
자꾸 자꾸 왼쪽 귀를 털고 있었다
요즘 나의 일은, 동네 뒷산인 야트막한 무학산(舞鶴山, 203m)산 숲속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참나무 둥치에 앉아 다시 뻐꾸기 소리를 듣는 일이다. 그 소리는 언제나 존재의 깊은 심연에 닿는다.
수억 겁 전에 이미 내 몸을 빌려 알을 낳아 살고 있는 그 탁란의 슬픈 뻐꾸기가 숲 속에서 날아와 내 시마(詩魔)를 흔든다. 귀 바퀴를 타고 감겨오는 청각이 아니라 마음 속 저 바다에서 들여오는, 먼 옛날 잃어버린 그 아비와 어미의 한숨 같은 뻐꾸기 울음소리. 뻐~꾹 뻐~꾹, 삐이 삐 삐. 내가 느낀 그 숲의 바람 소리에는 언제나 뻐꾸기의 정령이 소곤거리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시의 혈관에 흐르는 애내(欸乃)같은 흐느낌 같기도 하고, 한없이 일렁대는 몸 없는 것들의 살 부비는 소리 같기도 하고, 흔들리는 사물의 몸짓이 흘리고 간 사라진 문장의 여운 같기도 하다. 왜 나는 이 산 속의 뻐꾸기 소리에 홀려버렸는지 알 길이 없지만, 안개비 내리는 새벽 덤불 딸기 새로 나를 쳐다보던 고라니의 눈빛 곁에서 들었던 그 젖은 뻐꾸기 소리.
우연히 내가 그 숲 속의 무덤 위에서 띠풀을 발견한 것은, 빗물이 떨어지는 여름 한낮이었다. 여러 개의 빗방울은 내 머리에 떨어져 코와 뺨을 타고 등줄기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때 내 시선에 포획된 것은 무덤 위의 띠풀이었다. 놀랍게도 띠풀은 귀를 허공에 넣고 비 소리를 다 듣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아랫도리 벌쭉한 새 무덤 위에서 띠풀은, 흔들리는 바람 속에서 귓속 물이 찬 듯 자꾸자꾸 귀를 털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끊임없이 무덤을 적시고자 하는 빗물의 의지와, 그것을 떨구려는 띠풀의, 귀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에서 온 ‘침묵의 역설’이였는지 모른다. 마치 내가 이 숲 속의 뻐꾸기 울음 속에서, 시의 흐느낌을 찾아내었듯, 시「귓속 물이 차」(4시집『깍지』)는, 소리는 소리 아닌 몸으로 이루어져 있어 더욱 비극적인지 모른다.
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