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저 너머에 묻혀버린 h에게
김동원
내 마음속엔 언제나 해당화 꽃처럼 붉게 멈춰 버린
처녀의 무덤이 산답니다
저 바닷가 물밑에 가라앉아
진주가 돼버린 처녀랍니다
처녀는 곱고 수줍고 아름다운 머릿결이 물풀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운명처럼 만나
아침마다 해가 뜨기 전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바닷물 위 걸어서
해를 만지러 가곤 했습니다
해는 출렁이는 우리의 운명 같아
잡힐 듯 잡힐 듯 손길에서 멀어졌습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처녀는 그 겨울 바다 속 生이 잠기고
영원히 바닥에 잠겨서 물풀에 가려졌습니다
그 후 난, 문득문득 깊은 밤 혼자 잠에서 깨어나 웁니다
그토록 그리운 처녀는, 내 바다 위 어디에도 없고
백사장 흰 모래알 속에나 등대 불빛 밑으로
찾고 또 찾아 헤맸지만,
잃어버린 바닷길은 그대로 천 길 물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따금 처녀는 그 처녀는, 저 먼 시간의 저편 너머 수평선에서
붉은 해를 타고 올라와,
그 새벽 깨어나 우는 내 서러운 등을 두 손길로 따뜻이 어루만져 줍니다
첫사랑은 이승에 없는 꽃밭이다. 나의 소년기는 해와 달이 첫사랑 소녀를 중심으로 돌았다. 어쩌다 소낙비가 바다 물위로 달아나면, 하늘의 아름다운 작은 물기둥들이 악기 소리를 냈다.
자맥질로 본 물 속 풍경은 어린 내 눈엔 환상이었다. 소녀는 늘 내 곁에서 분꽃처럼 예쁘게 피어 있었다. 12살 어린 나이에 이미 나는 사랑의 불을 알았다. 그 봄날 소녀와 헤어졌을 땐, 꿈 속 분홍 분꽃이 다 떨어져 해와 함께 바다 물속에 녹아버렸다. 그랬다. 두 번 다시 피지 않을 그 꽃에 대해, 나는 한 번도 하늘에 묻지 않았다. 훗날 젊은 시인의 눈물이 되어 그 엉킨 피를「처녀와 바다」(『구멍』그루, 2002)란 시에서 영원히 묻었다.
「처녀와 바다」는 이유선 시낭송가의 목소리로, 예술기획〈진진아트〉에서 영상시로 제작돼 유튜브에 올려졌다. 그녀는 시적 화자의 숨소리, 눈길, 시선, 삶의 풍경들을 자신만의 독창적 창법으로 녹여, 소리 행간 속에 시의 의미를 촘촘히 새겨 넣었다.
「처녀와 바다」는 바다를 죽음과 사랑의 부활 공간으로 설정한다. 화자의 마음속엔 언제나 해당화 꽃처럼 붉게 멈춰 버린 처녀의 무덤이 살고 있다. 바닷가 물밑에 가라앉아 진주가 돼버린 처녀는, 어린 날 사랑했던 시인의 첫 사랑 소녀의 분신이다. 화자는 운명처럼 소녀를 만나 아침마다 해가 뜨기 전,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바닷물 위를 걸어서 해를 만지러 가곤 한다.
이 곱고 애절한 슬픈 영상은 죽은 처녀가 물 아래 수초 속에 잠겨들 때, 가장 슬프다. 시 행간 속에는 없지만, 아마 그 소녀와 헤어진 곳도, 흰 눈이 무너져 수평선 위로 흔적 없이 녹아 사라진 겨울 바다였는지도 모른다. 그 바다는 잡힐 듯 잡힐 듯 손길에서 멀어진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 이별 장소이자, 소년의 눈물이 고여서 된 바다이다. 수천 만 개의 해당화로 다시 핀 그 바다는 죽은 소녀가 처녀로 부활하는 성소이다.
그렇다. 바다는 죽음과 생의 경계 사이에서 시의 꽃으로 다시 핀다. 그 후「처녀와 바다」는 이유선에 의해 시 퍼포먼스로 또 한 번 무대 위에서 연출되었다.
퍼포먼스란 희곡 텍스트(대본)에 바탕을 두지 않고, 현장에서 행위예술가에 의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이다. 연극이 무대 공연을 전제한다면, 퍼포먼스는 이런 연극의 틀을 파격한 무작위적 예술행위다. 모든 행위 예술이 그렇듯, 퍼포먼스 또한 타인과의 소통을 몸짓의 기호로 표현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음악, 무용, 연극과 같은 공연 예술(performing art)을 시로 형상화 시킨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장르로서의 퍼포먼스 시, 즉, 행위예술가의 몸짓을 시로 재해석해 낸 파격이다.
그때까지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한 시「처녀와 바다」는, 이유선의 예술적 영감에 의해 퍼포먼스로 재창조되었다. 그는 그때 당시의 영감을 이렇게 말했다.〈나는 시 퍼포먼스를 통해「처녀와 바다」를 재발견했다. 그리고 자유로워졌다. 이제 내 몸이 시다.〉
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