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동원
남 다 가는 길 시인은 그런 길로 가는 게
아니야,
처음 보는 길 캄캄한 길 되돌아올 수 없는 길
누군 뭐 다 알고 가나, 가다 보면 알겠지
그렇게 가다 보면 달빛도 나오겠지,
안 나와도 못 갈 것 없지
길 없으면,
길 보일 때까지 눌러앉아 쉬면 되거든,
무작정 쉬는 재미 세상사
깜박 다 잊고
구름에 기대 쉬는 재미
여자 꽁무니도 한 번 따라가 보는 거야
모든 게 그 계곡서 흘렀으니,
혹, 그 길 보일지 누가
아나,
올라도 타 보는 거야, 그 상상력의 쾌미 속에, 그러다 안 되면
산도 들이받아 보고, 그 아래
처박혀도 보고
한밤중 술병을 들고 신 앞에 나서
버둥거려도 보고,
그래도그래도 풀리지 않거든,
그 이른 첫새벽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꺼이꺼이 해를 안고
다 타도록 울면 되지, 이제 알겠지
남 다 가는 길 시인은,
그런 길로 가는 게 아니야
대저, 천지창조의 시법(詩法)은 무량하다. 모든 사물의 근본은 하나지만 저마다 생긴 모양이 다르듯, 시법은 한 곳으로 귀착되나 그에 이르는 길은 천만 갈래이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요,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 세계, 그것이 시다. 유(有)가 유가 아니며 무(無)가 무가 아니듯, 시는 물질이자 에너지이다. 내가 생각하는 시란 그저 언어예술의 차원만은 아니다. 언어 이전의 사물과 실재의 비밀은 억겁을 통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생기(生氣, 生起)에 있다.
시는 이런 생생한 기운과 일어남, 사건 그 자체다. 찰나에 떠오르는 생각의 기미(機微)와 기색, 기척은, 시인이 아니면 잡을 수 없다. 하여 시인은 시신(詩神)과 접하거나, 시마(詩魔)에 들리어 귀신도 반할 귀시(鬼詩)를 짓거나 귀경(鬼景)을 펼쳐 보인다. 시의 예지가 번뜩이는 광인(狂人)이야말로 다름 아닌 시인이다. 시구 한 자를 빼면 우주가 무너지고, 시구 한 자를 더하면 한 우주가 생겨나는 묘처가 시이다. 시는 한바탕 무의식의 꿈이라도 좋다. 그 꿈을 깨고 나면 형(形)은 상(象)에 숨고, 상(象)은 다시 형(形)에 숨느니. 형상은 호흡에, 호흡은 형상에, 이것은 저것에, 저것은 다시 이것에 숨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연이 바로 시다.
하여, 가장 좋은 시는 시로 사는 것이다. 아니, 온몸으로 시를 먹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온다. 신(神)집힌 시가 고갱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 시다. 좋은 시는 술잔에 사랑을 태워 마신다. 하여 “젊은 시인의 시는 교과서요, 늙은 시인의 시는 참고서다.”(안도현)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것이 좋은 시다. 시는 언어의 심장이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지만 아무나 명시를 얻을 수는 없다. 시는 마음의 그림을 악보로 옮긴 것이다. 시로 살기, 시로 죽기, 이 절벽 타기 연습이 시다. 좋은 시는 감동과 여운 사이에 있다. 하여, 궁한 시는 아름답고 절박하다. 시인은 사악할 수 있어도 시는 악하지 않다. 귀신이 곡해야 명시다. 시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그윽하고 묘한 곳에 시의 싹이 트는 구나! 그리하여, 시여!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라.
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