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하석
청석 위 도꼬마리 풀섶에서 당신을 읽어요.
아파트 문을 나설 때, 환하게, 당신의 편지가
왔지요. 당장 문간에서 읽고 싶었지만,
나는 사랑 모르는 감옥에 갇힌 자들 속에 갇혀
홀로 한 곳으로 불타오르는 여자, 이 도시가 버린,
우리가 늘 만나는, 이 빈 터에서 당신을
읽고 싶었어요, 도꼬마리 풀섶 청석 위에서
당신을 읽어요. 문득 눈물이 솟구치네.
우린 늘 방이 그리웠지요. 그러나 우리의 방은
어디에도 없고, 티끌처럼 점처럼 우린 떠돌지요.
때로 눈물의 집 속에 들어 내가 바깥을 내다볼 때,
내가 깃든 눈물의 투명한 물방울집은
세상의 시선에 맞아 자주 터뜨려버려요.
세상 밖 어디에서 땅을 얻어 세상 밖
어디에다 우리 집을 지을까요? 도꼬마리 청석 위
우리가 가꾸는 세상은 도시의 빈터만큼
눈물겨워요. 이 도시의 빈터에서
당신을 읽어요.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과거는 사랑의 가면일 뿐, 언제나 사랑은 찰라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은 목숨 걸고 '사랑'에 대판거리하는 것이다. 이하석은 1948년 경북 고령에서 출생했다.
시「사랑」은 줄곧 그가 집요하게 추구해온 광물성 이미지나 식물성 이미지가 문명 비판적 시각과 만난 일군의 작품에서 상당히 동떨어진 시다. 아직 한 번도 평자에 의해 논의된 적 없는 변방의 시다.
독자 중 그의 빼어난 시집『투명한 속』의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익히 알고 있는 분은, 전혀 그답지 않은 여성적 화자가 주인공인 서간체 시풍의 도시적 서정시에 별 흥미를 못 가질 법 하다. 아무려면 어떤가. 난 자꾸만 그의 시「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 위에 지적된 그의 모든 시들의 시선이 '밖'으로 향했다면, 시「분홍 강」,「사랑」만은 오로지 시인의 '안쪽' 은밀성을 보여준다. 뭔가 말 못할 시인의 신비롭고 애틋한 애조와 사연이「사랑」에는 있다.
우선 이 시「사랑」의 화자는 여자다. 그 여자는 '아파트'란 현대적 공간 속에서 오로지 '사랑' 만을 위해 사는 여자다. 여자와 남자 사이엔 편지만이 유일한 소통의 증거다. 왜 하필 "청석 위 도꼬마리 풀 섶에서 당신"에게로부터 온 그리움의 편지를 읽었을까. 푸른 돌(靑石) 과 도꼬마리 풀과 그리고 여자와 편지 속 남자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청석은 청춘의 또 다른 비유라 치자 도꼬마리풀은 그럼 어떤 뜻이 숨었을까. 수십 개의 털바늘에 끈적거리는 액체가 묻어 있는 이 풀은 혹 이 둘의 비밀스런 관계를 암시한 소재는 아닐까. 왜 여자는 열렬히 사랑한 남자에게서 온 편지를 당장 “문간"에서 읽지 않고, "사랑 모르는 감옥에 갇힌 자들"을 피해 둘만이 늘 은밀히 만났던 그 "빈 터"에서 눈물을 쏟으며 편지를 읽었을까.
그렇다면 편지 속 주인공 남자는 미혼일까 기혼일까. 우리의 눈앞에 울고 있는 시「사랑」속 여자 역시 결혼한 여자란 말인가. 퍼뜩 머릿속 떠오른 이미지는 '불륜' 관계 아님, 옛 애인과 결혼 후에도 지속적 사랑 관계를 맺어오는 '로맨스' 그것도 아니라면, 시인 이하석의 차마 타인에게 고백하지 못할 그 어떤 사랑의 역설일까. "늘 우린 방이 그리웠"다고 한다. 이 시 행간은 두 사람만이 겪은 무한한 비밀 암호가 '방'으로 축약된다.
“우리”가 특별히 지시하는 함축적 의미는 뭘까. 통칭 '우리'라는 말뜻 속에는 '내 편' 또는 서로간의 소유를 함의한다. 그럼, 그 뭔가의 단서는 무엇인가. "때로 눈물의 집 속에 들어 내가 바깥을 내다볼 때, / 내가 깃든 눈물의 투명한 물방울집은 / 세상의 시선에 맞아 자주 터뜨려버려요" 우리가 "눈물의 집 속"을 거쳐 "바깥"에 이르면 시적 화자인 여자의 현재 처한 삶의 위치가 실가닥처럼 잡힌다. 그렇다. 그녀는 결혼한 주부였다. 그래서 "눈물의 투명한 물방울집은 / 세상의 시선에 맞아 자주 터뜨려버려요"라고 괴로워한다. 세상의 따가운 시선과 사랑의 죄 앞에 어찌할 수 없는 참혹한 '나'를 만난다.
“도시의 빈터”는 다름 아닌 그 옛날 사랑한 남자와 이별한 후 현실이 아플 때 이따금 통곡하는, 시 속 여성화자의 카타르시스 장소다. 그럼 '편지'는 허구인가 사실인가. 그건 독자의 몫이다.
<해설가>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