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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순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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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마침 동지(冬至)다. 1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날이다. 다시 말해 가장 어두운 날이란 뜻이다. 요즘 모든 것이 오리무중 그 자체다. 나라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다. 최악의 조류인플루엔자(AI)가 창궐한다는데 제대로 대응은 하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요동치는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싸움도 마치 남의 일인 양 멀게만 느껴진다.
동지는 역설적이다. 동지가 지나고 나면 낮의 길이가 하루하루 길어진다. 황량한 죽음의 밑바닥에서 새로운 생명의 태동을 느낀다. 지난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고,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리에 들어갔다. 두 달 가까이 천지를 흔들었던 촛불집회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다. 미흡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이제는 새로운 모색을 준비할 때다.
12년 만에 현직 대통령이 직무정지됐다. 미우나 고우나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국정운영의 키를 쥐고 이 험난한 파도를 넘어가야만 한다. 당장은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국정의 기조를 바로잡아야 한다. 숨을 죽이고 복지부동하려는 공직사회가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관료들이 움직이기 시작해야 나머지 다른 부분들에서도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하 황 대행)의 책무는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비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중국은 문화대혁명(1966~76) 기간 그야말로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마오쩌둥 주석과 4인방이 기성체제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 홍전(紅專)전쟁을 벌이며 중국을 초토화시켰다. 그때 만약 저우언라이 총리가 중심을 잡지 못했더라면 오늘날 G2로서의 중국은 없었을 것이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활약은 실로 경이롭다. 죽기살기식의 정치투쟁과는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 오로지 민생과 인민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헌신했다. 1976년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는 군중이 100만명을 넘었고 1차 톈안먼사태로 이어졌다.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이 중국을 재건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오로지 저우언라이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 대행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딱 두 가지다. 첫째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마지막 공직이라는 마음으로 국민을 믿고 죽을힘을 다해 달라는 것이다. 둘째는 주변의 이런저런 유혹도 간섭도 물리치고 오로지 역사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국정에 임해 달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 지키면 황 대행은 먼 훗날 역사에 ‘위대한 2인자’(저우언라이에게 주어진 별칭)란 말을 들을 것이다.
황 대행이 이번이 마지막 공직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는 순간 상당히 용기 있게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 그동안 왜곡되었던 공직사회의 인사부터 바로잡을 수 있다. 무슨 낙하산 인사니, 무슨 코드 인사니 하는 퇴행적 악습을 뿌리 뽑을 수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수치스러운 낙인이 찍힌 국정운영 시스템도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대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다.
황 대행이 국정에 매진하면 할수록 주변에 아첨하는 무리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내친 김에 뻗어가라고 달콤한 유혹을 할 것이다. 그 달콤함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엄청난 역풍이 황 대행을 후려칠 것이다. 또 야권은 지금 당장 이 순간부터도 황 대행을 견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를 가장 유력한 잠재적 경쟁 상대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길들이고 기를 죽이려고 들 것이다.
욕심이 없으면 좌고우면할 까닭이 없다. 정치권의 이런저런 턱없는 주문에 휘둘릴 이유도 없다. 그러는 것이 박근혜정부의 법무장관, 국무총리로서 국정이 망가진 데 대한 연대책임이 있는 황 대행이 최소한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길이기도 하다. 지금 황 대행의 일거수일투족이 국운을 가르는 분수령이 될 수 있다. 그 이후의 일은 그 이후에 맡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