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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순 정치평론가 |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어느 누구도 바람을 본 사람은 없다. 다만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가운데 바람을 느낄 뿐이다. 지난달 25일 상징적인 스침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프리카·프랑스 순방을 위해 출국하던 바로 그날 오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방한했다. 과연 반 총장이 어떤 이야기를 할까, 또 애매모호한 행보를 거듭할까, 많은 궁금증이 있었다.
반 총장의 별명은 ‘기름장어’라고 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외교관답게 처신과 언행이 매끄럽다 못해 얄밉기조차 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5박6일 방한 기간 중 드러난 반 총장의 모습은 ‘기름장어’와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때로는 돌직구를 던지는가 하면 또 각도 큰 커브와 체인지업을 적절히 섞어가면서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치9단을 찜 쪄 먹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귀국하자마자 첫 일정으로 중견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과 간담회를 가졌다. 만찬장의 외빈들을 1시간 이상 기다리게 하면서까지 자신이 해야 할 말들을 다 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나는 대선에 나온다. 다만 공식발표는 내년 초’이다. 보수진영의 원로인 김종필 전 총리와의 전격회동, 하회마을 방문 등 반 총장은 숨 쉴 틈 없이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반기문바람(潘風)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선 4·13 총선에서 참담한 패배로 망연자실하고 있던 보수여권의 숨통을 틔웠다. 반 총장의 방한을 전후해 새누리당은 혼란을 수습할 가닥을 잡았다. 김무성 전 대표를 비롯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여론조사 상으로도 그렇다. 그제 발표된 리얼미터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여권주자들의 지지율 총합이 지난주에 비해 9%포인트(32.5%→41.5%)나 상승했다.
진보야권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4·13총선에서 여권의 분열과 본헤드플레이로 야당은 예기치도 않았던 대승을 거저 줍다시피 했다. 여권 대선주자도 거의 전멸한 상태다. 이 기세 이대로 밀어붙이면 2017년 대선승리의 고지가 코앞이다. 그런데 반기문 변수가 등장했다.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20주 연속 대선주자 지지율 1위를 질주하던 문재인 전 대표(23.2%)는 그 자리를 반기문 총장(24.1%)에게 내주었다. 안철수 대표는 4.2%포인트(16.1%→11.9%) 감소했다.
진보야권은 본격적으로 반기문 견제에 나섰다. 견제카드는 ‘의리론’과 ‘자질론’이다. ‘의리론’은 이렇다. 참여정부가 반기문 외교부 장관을 유엔 사무총장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반 총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조차 참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5년 당시 참여정부는 홍석현 주미대사를 유엔 사무총장으로 밀었다. 그런데 안기부 X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홍 대사가 낙마했고, 그 대안으로 반 장관이 뒤늦게 출마했다. 또 일단 출마했으면 대한민국 누구라도 반 장관의 당선을 위해 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질론’은 이렇다. “참여정부 시절 함께 장관을 해봤는데 비전과 전략이 부족하다. 반 총장의 대권행보는 한국의 체면을 깎는 일이다”(정세균), “외교관은 국내정치와는 안 맞는다. 본인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이해찬)는 식이다. 바로 작년까지 권노갑, 박지원 등 동교동계는 물론이고 문재인 대표까지 나서 반 총장을 칭송하면서 함께하자고 했던 일은 까맣게 잊은 듯하다.
마침 오늘(8일) 미국 뉴욕에서 반기문 총장과 이해찬 의원 간의 만남이 있다.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방문 중인 이 의원에게 반 총장이 먼저 연락을 했다고 한다. 이 의원은 참여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역임한 친노의 좌장이다. 지금도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여기서 반 총장의 강력한 대권의지를 엿볼 수 있다. 더 이상 피하거나 숨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검증이든 흠집내기든 어차피 한번은 넘어야 하고, 넘겠다는 뜻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