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가 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한국정치사(史)로 볼 때 한편으로는 ‘인동초’의 고난의 역정이었고, 다른 편으로는 배신과 술수의 ‘파노라마’였지만 산술적으로도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전라도 낙도 출신의 비주류 인물이 기라성 같은 인사들이 즐비한 정치판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대권을 움켜쥐었으니 여기에는 그자신이 즐겨 말한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商人的) 현실감각”이 주효했고 시대적 運도 작용했다.
▲최기덕 (여의도 정치미디어
그룹 대표)
어려서부터 영민했던 김대중은 당시 명문인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선박회사를 운영하여 재력도 갖추었으나 6.25 당시 좌익인사들의 예비단속에 걸려 죽을 고비를 맞았다. 당시 목포지구 해군헌병대장 박성철의 도움으로 살아난 후 장면 등 이북출신 가톨릭계 인사들의 그룹인 민주당 신파로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평생 좌익의 딱지가 붙은 김대중은 이를 탈피하려 부단히 노력하였고 기독교계의 여성운동가 이희호와 재혼하며 정치적 運도 피게 된다.
뛰어난 언변의 DJ는 1970년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일약 전국적인 저명인사가 되어 이후 한국정치의 거목으로 행세하게 된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일본에 있던 DJ는 조총련계 인사들과 반정부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여 동교동에 연금되었는데 역설적이지만 이때부터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어 한국정부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인물이 된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연금에서 풀려난 DJ는 야당 내에서는 세력이 약했기에 주로 재야인사 학생운동권 인사들과 어울리며 ‘장외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1980년 ‘서울의 봄’을 끝으로 신군부가 다시 권력을 쥐며 DJ는 ‘5.18 광주사태’의 주모자가 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전두환의 레이건 미국대통령 방문조건으로 석방되어 이후 워싱톤에서 망명생활을 한다. 이때 DJ의 측근이 된 사람들이 미국에 거주하던 박지원, 유종근, 김경재 등이다.
DJ는 미국에서 지지자들을 모으고 강연활동을 하며 보냈으나 시간이 갈수록 활동과 자금의 한계에 부딪혀 귀국을 모색한다. 그런데 필리핀의 마르코스에 반대해 워싱톤에 망명해있던 아키노 상원의원이 귀국길에 마닐라 공항에서 총에 맞아 죽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하자 DJ는 당시 주미대사 유병현에게 유럽 방문과 로마 교황 접견을 위해 출국할 수 있도록 자신의 단수여권을 연장하여 주기를 요청했다가 묵살되자 할 수 없이 귀국을 결행한다. 그러나 뜻 밖에도 김포공항에 몰려든 지지자들과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거국적인 환영을 받는다. 이후 DJ는 재야인사와 전라도의 전폭적 지지를 업고 평민당을 창당하고, YS는 민주당 총재로 JP는 신민주공화당 총재로 이들만의 화려한 ‘3金 시대’가 시작된다. 13대 총선 이후 각 정당에는 공천은 곧 당선인 ‘지역주의’가 고착되고 3金 보스들의 ‘정당독재시대’가 시작된다.
과거의 야당지도자는 조직과 인맥을 관리하고 선거를 치루기 위한 막대한 정치자금 조달이 큰 책무였다. 선거공영제가 실시되기 전에는 당선권의 비례대표 공천은 곧 자금조달창구였고 이 돈으로 취약지구 후보도 지원하고 당 살림도 꾸렸다. 그러나 지역구도로 인해 영호남 충청 지역의 맹주로 자리 잡은 3金은 이 지역 공천 희망자들에게 비례대표 공천에 맞먹는 자금을 받고 공천을 주었다. 이조시대의 돈 놓고 자리 먹는 매관매직 행태가 재연된 것이다. 상재(商才)가 있는 DJ는 이런 공천장사로 큰 돈을 치부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DJ의 부상에 위협을 느낀 YS는 “호랑이를 잡으러 범의 굴에 들어간다”며 노태우의 민정당과 JP의 공화당과 3당 합당으로 신한국당을 만들고 어려서부터의 소원인 대통령이 된다. 이때 3당 합당을 반대한 노무현은 이후 ‘꼬마 민주당’을 거쳐 DJ 정부시절 해수부 장관을 지내고 DJ 사람이 되어 대통령이 되었지만 원래는 13대 총선에서 YS의 공천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5-60년대 주한 美대사관의 문정관을 지낸 그레고리 핸더슨은 ‘소용돌이의 정치(Politics of Vortex)’라는 책에서 한국의 정치를 지도자를 중심으로 휩쓸려가는 소용돌이 바람의 패거리 정치라고 분석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한국정치는 ‘보스’와 그를 따르는 패거리, 일본식의 ‘오야붕’과 ‘꼬붕’들의 뭉쳤다 헤어지는 이합집산의 정치에 다름 아니다. 이래서 정당인들은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소위 ‘끼끼빠빠’에 능숙한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자조(自嘲)한다. 黨(당)의 보스에게 목을 매고 충성할 수 밖에 없는 근본요인은 정당인에게 생사여탈의 문제인 공천권을 당 총재가 쥐고 있기 때문이며 정당內 정파 싸움은 결국 공천지분의 문제인 것이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평민당을 창당해 황색바람을 일으키며 국내에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게 된 DJ는 제1야당의 총재로 군림하며 노태우 정부와 견제와 협조를 하게 되고 이에 위기를 느끼게 된 YS는 JP와 함께 ‘여소야대’ 정국의 한계에 봉착한 노태우와 3당 합당을 하게 된다. 한국정치사에서 재야인사들이 대거 제도권정당에 진출하는 계기가 바로 13대 총선이었으니 이때 이철, 이해찬, 유인태 등 민청학련사건의 운동권출신들이 야당의 공천으로 대거 당선된다.
DJ는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가 처음 실시된 1987년의 13대 대통령선거의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과의 대결에서 ‘4자 필승론’에 고무되어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야당분열 책임론으로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88년의 총선에서 재기하게 된다. 이후 1992년의 제14대 대선에서는 YS에게 또다시 패해 정치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난다. 그러나 정치판의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속설처럼 DJ는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대권도전 4수를 시작한다. 이때 영입한 인사들이 96년 제15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아 현재 야당의 지도부가 된 정동영, 천정배, 정세균, 신기남, 김한길, 추미애 등이고 재야의 故김근태와 학생운동권 출신의 김민석이다. (계속)